[기획-디아스포라] 38. 북한에 억류 중인 납북자 및 국군포로 귀환 사업 추진 필요... 경제적 대가를 지급해서라도 해결해야
북한 이산가족 지원의 필요성과 통일 기반 조성 방안... 남북한의 사회·문화의 통합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
2026년 10월24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중국을 방문한 후 귀국했다. 북한의 신의주에서 바로 알록강 건너편에 있는 중국 단둥(丹东)을 1일 동안 다녀왔다.
6·25 전쟝에 첨전해 전사한 중공군의 위령탑에 헌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기존에는 열차를 이용했지만 이번에는 중국의 투자금으로 건설한 신압록강대교를 자동차로 건넜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한 후 러시아로부터 대규모 경제지원을 받아 경제가 활황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과도 신압록강대교를 통해 육로 무역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여전히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대치 국면은 해소되지 않았다.
▲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 납북자·국군포로 귀환사업의 필요성... 경제적 대가를 지급해서라도 해결해야
통일부는 북한에 억류 중인 납북자, 억류자, 국군포로의 귀환을 위해 노력 중이다. 정부는 남북적십자회담, 남북 장관급회담 등을 통해 이들의 귀환을 위해 시도했지만 성과는 미진하다.
일부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가족을 만났으며 생사를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피해자는 제대로 된 현황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은 인도주의 차원의 만남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납북자는 전시 납북자와 전후 납북자로 구분된다. 전자는 남한에 거주하던 국민 중에서 6·25 전쟁 중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납북되어 북한에 억류 또는 거주하게 된 사람이다.
반면에 후자는 1953년 군사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 본안의 의사에 반해 남한에서 북한에 들어가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다.
북한은 6·25 전쟁 중에 정치적 목적으로 정치인, 종교인, 예술인 등을 북으로 끌고 갔다. 정부는 전쟁 발발 이후부터 1963년까지 납치자 명부를 작성했다.
1952년 작성된 6·25 사변 피랍자 명부가 가장 많았는데 8만295명으로 조사됐다. 1954년 작성된 실향사민 명부는 1만7900명, 1956년 조사한 실향사민 신고서는 7035명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2010년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며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 회복 위원회’를 설치해 활동했다.
위원회는 1950년부터 1963년까지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납북자가 10만 명 내외로 추정했지만 납북 피해 신고로 접수한 5505건을 심사해 4777명만 납북자로 인정했다.
납북자 가족은 전쟁 이후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었을 뿐 아니라 이념 대결 과정의 희생자였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이승만정부와 박정희정부 뿐 아니라 1990년대 초 군사정부까지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북한의 침공에 동조했거나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불명예도 감수해야 했다.
전후 납북자는 남북이 극렬하게 대치했던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주로 발생했다. 동해와 서해상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가 전후 납북자 3825명 중 3829명으로 전체의 97%를 차지했다. 특히 서해의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어로 작업을 하던 어부의 피해가 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4년 정부에 납북자 문제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고 진상을 규명하며 납북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보상을 우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2007년 4월 ‘군사정적에 관한 협정 체결 이후 납북피해자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전후납북자법)’이 제정됐다. 2007년부터 2024년까지 466건이 접수돼 443건이 인정을 받았다. 가족에게 지급된 피해위로금은 총 150억 원에 달했다.
국군포로는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참전 또는 임무 수행 중 적국(반국가 단체 포함)이나 무장 폭도 또는 반란집단 등에 의해 억류 중인 사람 또는 억류지를 벗어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6·25 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한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에 국군 실종자는 약 8만2000명으로 추정됐지만 포로 교환을 통해 귀환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 1994년 조창호 소위가 중국을 경유해 한국으로 귀환 이후 총 80명이 돌아왔지만 북한에 몇 명이나 생존해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국군포로는 휴전 당시에 20대의 청년이라고 해도 70년이 지난 현재 대부분 90대를 넘어선 노인으로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낮다. 북한의 가혹한 착취와 열악한 식량 사정도 이들의 생존율을 떨어뜨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북한이 식량 부족으로 100만 명에 가까운 아사자를 경험한 1990년대 중반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이후 국제사회의 봉쇄정책이 경제난을 가중시켰다.
2002년 개최된 제4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남북은 북한이 제의한 전시행불자의 생사·주소 확인 문제를 협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전후 납북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인도주의 차원에서라도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귀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들이 사망하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희망한다. 필요하다면 북한에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북한 이산가족 지원의 필요성과 통일 기반 조성 방안... 남북한의 사회·문화의 통합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
남북 이산가족의 문제는 당사자 개인이 아니라 사회 및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이산 가족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해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특히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며 반감을 갖게 된 국민이 많다. 북한측 방문단이 공개적으로 북한을 찬양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북한 체제를 선전하거나 돈벌이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의 금강산에 이산가족 상봉 장소를 만든 것이 대표적인 상업적 접근법이다.
그렇다고 이산가족 문제를 방치할 수만도 없다.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한 사회체제의 이질감을 줄여주고 통일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는 1971년 8월 12일 남북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북한에 제의했다. 1984년 남한의 홍수 피해에 북한이 수해 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서면서 진전이 없던 남북대회는 다시 시작됐다.
1985년 9월 20일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이 처음 이뤄진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며 다음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8월 15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2000년 이후 2018년까지 총 21차에 걸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2005년 도입된 화상 상봉도 2007년까지 7회나 진행됐다.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이산가족 상봉은 컴퓨터 추첨 방식으로 선정된 일부만 대상으로 하므로 규모가 크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을 통해 북한과 연결된 민간단체나 중개인이 제3국에서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일회성 행사에 그치는 공식 행사와 달리 민간 교류는 당사자의 의지에 따라 반복도 가능하다.
특히 민간 차원은 정부 차원에서 소외되었던 북한측 ‘월남자가족’도 남한에 있는 가족과 교류할 기회를 제공했다. 제3국 상봉이 활성화되면서 북중 국경지대뿐만 아니라 평양, 남포, 개성 등 내륙 지역에 거주하는 가족까지 만남이 활발해졌다.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중단된 정부 간 교류를 보완하는 방안으로 민간 차원의 교류를 강화하라고 조언한다. 북한이 정치 선전장으로 활용하는공식적인 교류는 남북한의 정치체제나 사회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반면에 정부의 감시가 없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만나면 체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상호 간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북한 당국의 감시가 없는 민간 만남에서 북측 가족에게 경제적 지원도 가능해져 이들의 생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북한 사회에서 핍박을 받고 있는 월남자 가족이 남쪽에 있는 가족이나 미국 및 일본에 살고 있는 가족·친척의 경제적 도움으로 생활이 개선된 사례에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북한 정부도 이러한 사정을 파악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재 북한은 공식적으로 이산가족이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제3국에서 남한 가족과 교류하는 것을 불법행위로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민간 차원의 교류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북한 정부가 관련 사실을 파악하고 있지만 눈감아주고 있다는 증거다. 경제난으로 불만이 증폭된 주민의 반발을 두려워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해외 가족의 지원이 배급체제의 한계를 보완하고 있는 장마당과 같은 시장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장마당은 북한 화폐보다 미국이나 중국의 돈이 더 많이 유통되고 있다.
2020년 이후 3년 동안 이어진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2022년부터 보수 정부의 집권 등은 이산가족의 상봉을 어렵게 만들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2023년 1월 기준 정부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생존자는 4만2220명으로 조사됐다.
이들 중 67.8%인 2만8605명은 80~90대로 고령화가 심각하다. 2022년에만 상봉을 기다리다 사망한 이산가족은 3647명에 달했다.
이산 1세대가 겪고 있는 고통과 한(恨)은 이산가족 상봉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 2~3세도 부모 세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비슷한 심리적 애로를 겪는다고 봐야 한다. 남북한 정부가 이들의 적발한 심정을 이해해 적극적으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통일부는 2023년 제4차 남북 이산가족 교류촉진 기본계획(2023~2025)에 4대 추진과제로 이산가족 교류 재개 및 활성화, 국군포로·납북자·억류자 문제 해결, 이산가족 교류 기반 확대, 이산가족 위로 및 대내외 공감대 확산 등을 포함시켰다.
우리 정부의 의지와 달리 문제는 북한의 태도가 전향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다수 국민은 200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 정부가 교차 집권하며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비판한다.
특히 북한이 납득할 만한 해명조차 내놓지 않고 남북한 합의사항을 휴지 조각으로 취급해도 남한 정부의 대응이 미온적이라고 질타한다.
대다수 국민이 일부 이산가족 문제로 남한 정부에 끌려다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식하면 이산가족 문제는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다.
이산가족은 단순히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한의 사회 및 문화의 통합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치라는 점은 홍보해야 한다.
특히 보수와 진보 등 집권 세력의 변화에 따라 이산가족 정책이 좌지우지(左之右之)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최고정책결정권자인 대통령이나 통일부 등 관련 부처 장관의 교체와 관계없이 순수 인도주의적 사안으로 이산가족 정책을 펼쳐나가야 한다.
6·25 전쟝에 첨전해 전사한 중공군의 위령탑에 헌화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기존에는 열차를 이용했지만 이번에는 중국의 투자금으로 건설한 신압록강대교를 자동차로 건넜다.
북한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한 후 러시아로부터 대규모 경제지원을 받아 경제가 활황세를 보이고 있다. 중국과도 신압록강대교를 통해 육로 무역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여전히 한반도에서 남북한의 대치 국면은 해소되지 않았다.
▲ 1950년 발발한 625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 납북자·국군포로 귀환사업의 필요성... 경제적 대가를 지급해서라도 해결해야
통일부는 북한에 억류 중인 납북자, 억류자, 국군포로의 귀환을 위해 노력 중이다. 정부는 남북적십자회담, 남북 장관급회담 등을 통해 이들의 귀환을 위해 시도했지만 성과는 미진하다.
일부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통해 가족을 만났으며 생사를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다수 피해자는 제대로 된 현황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북한은 인도주의 차원의 만남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납북자는 전시 납북자와 전후 납북자로 구분된다. 전자는 남한에 거주하던 국민 중에서 6·25 전쟁 중 본인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납북되어 북한에 억류 또는 거주하게 된 사람이다.
반면에 후자는 1953년 군사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에 본안의 의사에 반해 남한에서 북한에 들어가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다.
북한은 6·25 전쟁 중에 정치적 목적으로 정치인, 종교인, 예술인 등을 북으로 끌고 갔다. 정부는 전쟁 발발 이후부터 1963년까지 납치자 명부를 작성했다.
1952년 작성된 6·25 사변 피랍자 명부가 가장 많았는데 8만295명으로 조사됐다. 1954년 작성된 실향사민 명부는 1만7900명, 1956년 조사한 실향사민 신고서는 7035명으로 큰 차이를 보였다.
2010년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며 ‘6·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 회복 위원회’를 설치해 활동했다.
위원회는 1950년부터 1963년까지 조사한 결과를 바탕으로 납북자가 10만 명 내외로 추정했지만 납북 피해 신고로 접수한 5505건을 심사해 4777명만 납북자로 인정했다.
납북자 가족은 전쟁 이후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었을 뿐 아니라 이념 대결 과정의 희생자였다. 반공을 국시로 내세웠던 이승만정부와 박정희정부 뿐 아니라 1990년대 초 군사정부까지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북한의 침공에 동조했거나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불명예도 감수해야 했다.
전후 납북자는 남북이 극렬하게 대치했던 1950년대부터 1970년대에 주로 발생했다. 동해와 서해상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가 전후 납북자 3825명 중 3829명으로 전체의 97%를 차지했다. 특히 서해의 북방한계선(NLL) 인근에서 어로 작업을 하던 어부의 피해가 컸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004년 정부에 납북자 문제에 대한 실태를 파악하고 진상을 규명하며 납북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보상을 우한 특별법을 제정하라고 권고했다.
2007년 4월 ‘군사정적에 관한 협정 체결 이후 납북피해자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전후납북자법)’이 제정됐다. 2007년부터 2024년까지 466건이 접수돼 443건이 인정을 받았다. 가족에게 지급된 피해위로금은 총 150억 원에 달했다.
국군포로는 ‘대한민국 군인으로서 참전 또는 임무 수행 중 적국(반국가 단체 포함)이나 무장 폭도 또는 반란집단 등에 의해 억류 중인 사람 또는 억류지를 벗어난 사람으로서 대한민국으로 귀환하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6·25 전쟁과 베트남전쟁의 실종자까지 모두 포함한다.
1953년 정전협정 당시에 국군 실종자는 약 8만2000명으로 추정됐지만 포로 교환을 통해 귀환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 1994년 조창호 소위가 중국을 경유해 한국으로 귀환 이후 총 80명이 돌아왔지만 북한에 몇 명이나 생존해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국군포로는 휴전 당시에 20대의 청년이라고 해도 70년이 지난 현재 대부분 90대를 넘어선 노인으로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낮다. 북한의 가혹한 착취와 열악한 식량 사정도 이들의 생존율을 떨어뜨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북한이 식량 부족으로 100만 명에 가까운 아사자를 경험한 1990년대 중반에 어려움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1993년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이후 국제사회의 봉쇄정책이 경제난을 가중시켰다.
2002년 개최된 제4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남북은 북한이 제의한 전시행불자의 생사·주소 확인 문제를 협의했다. 하지만 북한은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특히 북한은 전후 납북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인도주의 차원에서라도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귀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들이 사망하기 전에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길 희망한다. 필요하다면 북한에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북한 이산가족 지원의 필요성과 통일 기반 조성 방안... 남북한의 사회·문화의 통합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
남북 이산가족의 문제는 당사자 개인이 아니라 사회 및 국가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이산 가족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해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특히 북한이 이산가족 상봉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며 반감을 갖게 된 국민이 많다. 북한측 방문단이 공개적으로 북한을 찬양하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북한 체제를 선전하거나 돈벌이의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북한의 금강산에 이산가족 상봉 장소를 만든 것이 대표적인 상업적 접근법이다.
그렇다고 이산가족 문제를 방치할 수만도 없다. 이산가족 상봉은 남북한 사회체제의 이질감을 줄여주고 통일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적십자는 1971년 8월 12일 남북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남북적십자회담을 북한에 제의했다. 1984년 남한의 홍수 피해에 북한이 수해 물자를 제공하겠다고 나서면서 진전이 없던 남북대회는 다시 시작됐다.
1985년 9월 20일 남북 이산가족의 상봉이 처음 이뤄진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며 다음 이산가족 상봉은 2000년 8월 15일까지 기다려야 했다.
2000년 이후 2018년까지 총 21차에 걸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다. 2005년 도입된 화상 상봉도 2007년까지 7회나 진행됐다.
정부 차원에서 추진한 이산가족 상봉은 컴퓨터 추첨 방식으로 선정된 일부만 대상으로 하므로 규모가 크지 않다. 2000년대 이후 중국을 통해 북한과 연결된 민간단체나 중개인이 제3국에서 만남을 주선하고 있다. 일회성 행사에 그치는 공식 행사와 달리 민간 교류는 당사자의 의지에 따라 반복도 가능하다.
특히 민간 차원은 정부 차원에서 소외되었던 북한측 ‘월남자가족’도 남한에 있는 가족과 교류할 기회를 제공했다. 제3국 상봉이 활성화되면서 북중 국경지대뿐만 아니라 평양, 남포, 개성 등 내륙 지역에 거주하는 가족까지 만남이 활발해졌다.
통일문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중단된 정부 간 교류를 보완하는 방안으로 민간 차원의 교류를 강화하라고 조언한다. 북한이 정치 선전장으로 활용하는공식적인 교류는 남북한의 정치체제나 사회 실상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반면에 정부의 감시가 없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만나면 체제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교환함으로써 상호 간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 북한 당국의 감시가 없는 민간 만남에서 북측 가족에게 경제적 지원도 가능해져 이들의 생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북한 사회에서 핍박을 받고 있는 월남자 가족이 남쪽에 있는 가족이나 미국 및 일본에 살고 있는 가족·친척의 경제적 도움으로 생활이 개선된 사례에도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북한 정부도 이러한 사정을 파악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현재 북한은 공식적으로 이산가족이 당국의 승인을 받지 않고 제3국에서 남한 가족과 교류하는 것을 불법행위로 금지하고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이후 민간 차원의 교류가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은 북한 정부가 관련 사실을 파악하고 있지만 눈감아주고 있다는 증거다. 경제난으로 불만이 증폭된 주민의 반발을 두려워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
해외 가족의 지원이 배급체제의 한계를 보완하고 있는 장마당과 같은 시장경제 활성화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장마당은 북한 화폐보다 미국이나 중국의 돈이 더 많이 유통되고 있다.
2020년 이후 3년 동안 이어진 코로나19 팬데믹(대유행), 2022년부터 보수 정부의 집권 등은 이산가족의 상봉을 어렵게 만들었다. 통일부에 따르면 2023년 1월 기준 정부에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생존자는 4만2220명으로 조사됐다.
이들 중 67.8%인 2만8605명은 80~90대로 고령화가 심각하다. 2022년에만 상봉을 기다리다 사망한 이산가족은 3647명에 달했다.
이산 1세대가 겪고 있는 고통과 한(恨)은 이산가족 상봉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다. 2~3세도 부모 세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비슷한 심리적 애로를 겪는다고 봐야 한다. 남북한 정부가 이들의 적발한 심정을 이해해 적극적으로 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
통일부는 2023년 제4차 남북 이산가족 교류촉진 기본계획(2023~2025)에 4대 추진과제로 이산가족 교류 재개 및 활성화, 국군포로·납북자·억류자 문제 해결, 이산가족 교류 기반 확대, 이산가족 위로 및 대내외 공감대 확산 등을 포함시켰다.
우리 정부의 의지와 달리 문제는 북한의 태도가 전향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다수 국민은 2000년대 이후 보수와 진보 정부가 교차 집권하며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비판한다.
특히 북한이 납득할 만한 해명조차 내놓지 않고 남북한 합의사항을 휴지 조각으로 취급해도 남한 정부의 대응이 미온적이라고 질타한다.
대다수 국민이 일부 이산가족 문제로 남한 정부에 끌려다니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인식하면 이산가족 문제는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다.
이산가족은 단순히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남북한의 사회 및 문화의 통합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조치라는 점은 홍보해야 한다.
특히 보수와 진보 등 집권 세력의 변화에 따라 이산가족 정책이 좌지우지(左之右之)되는 것은 용납하기 어렵다. 최고정책결정권자인 대통령이나 통일부 등 관련 부처 장관의 교체와 관계없이 순수 인도주의적 사안으로 이산가족 정책을 펼쳐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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