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34. 민족 관련 이론과 형성 요인... 서양에서 근대론이 주류 이론으로 자리매김
계급투쟁의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한 방안으로 민족 개념 부상... 공동체의 해체 속에서 계급투쟁이 심화
민진규 대기자
2026-10-01 오전 10:15:26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도 100년 이상 민족이란 구호를 내건 전쟁으로 수천만 명이 희생됐다. 특정 민족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나 경제적 궁핍으로 초래된 사회구성원의 불만을 달래줄 희생양(scapegoat)이 다른 민족이었다.

중세 이후 합리주의 철학을 신봉했던 유럽 대륙의 국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근대에 들어 유럽에서 일어난 다수의 전쟁이 민족간 갈등이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1980년 신자유주의 열풍과 세계화 기조는 민족에 대한 개념을 퇴색시켰다. 대신에 글로벌 시민(global citizen)이라는 용어가 풍미하며 민족은 한물간 용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민족은 국제분쟁의 씨앗으로 부상햇다.


▲ 1886년 이집트 스핑크스 앞에 선 프랑스 황제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Bonaparte Napoléon)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4가지 민족주의 이론의 차이점 비교... 서양에서 근대론이 주류 이론으로 자리매김

민족이라는 용어 자체가 민감하고 폭발력을 가진 단어이기 때문에 이를 연구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대표적인 민족주의 이론은 원초론(Primordialism), 영속론(Perennialism), 종족상징론(Ethno-Symbolism), 근대론(Modernism) 등으로 구분된다. 

먼저 원초론은 민족은 원초적이고 인류 시작부터 존재했으며 꾸준히 발전했다는 주장이다. 왜 사람들이 민족에 열정과 애착을 보이는지 설명한다. 민족의 토대는 혈연적 공동성과 단일 조상이며 문화적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애착이 기초라고 본다.

원초론은 민족의 영속적 성격을 강조하며 종족, 조상, 종교, 언어, 영토 등 원초적 유대가 중요하다고 본다. 민족주의 운동가나 정치인이 선호하는 이론이다.

유대인이 중세부터 유럽 대륙에서 차별을 겪으며 시오니즘(Zionism)을 외치고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결국 1948년 독립 국가를 건설했다.

일제 압제하에서 조선인의 민족주의는 원초론적 성격을 강화해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위해 정체성과 연대성을 강조했다. 단군을 조상으로 삼고 한반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공동체라는 인식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려는 의도가 강했다.

둘째, 영속론은 민족주의적 이데올르기는 근대에 출발했지만 민족은 태고부터 존재했다는 인식을 기반으로 한다. 민족은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 현상으로 역사적인 연속성을 강조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역사학계의 전반적인 흐름이었다.

영속론은 연속적 연속론과 순환적 영속론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민족의 기원은 중세를 넘어 고대까지 확장된다고 보는 반면 후자는 역사, 시간의 흐름에 따라 민족은 탄생, 소멸한다고 인식한다. 연속적 연속론보다 순환적 영속론이 더 설득력이 강하다.

한반도가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해 있지만 거대한 산맥이나 강으로 단절되지는 않았다. 고구려가 만주 대륙에서 활동하다 세력이 약해져 한반도 중부 대동강 지역으로 천도(遷都)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고구려의 주류 지배층이 한민족이라고 주장하지만 다수 국민은 돌궐 등 만주 지역의 이민족이라고 봐야 한다. 한민족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등을 거치며 주류 지배계층이 바뀌며 탄생과 소멸을 반복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셋째, 종족상징론은 중세 이후로 내려오는 종족의 역사, 신화, 상징, 전통으로부터 형성됐다고 파악했다. 민족은 종족의 세속화된 형태로 간주하며 민족 형성의 원인은 종족적, 문화적 정체성이라보 본다.

종족은 혈통이 아니라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공유된 기억과 집단적 운명을 인정한다. 종족과 결부된 상징, 전통, 기억, 신화에 근거한 종족적 주체의 경험과 실천과 의미가 중요하다. 근대론의 한계를 보완하고 종족과 민족의 연속성 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한민족이 혈통보다는 의복, 음식, 음악, 장례 의식 등을 기존으로 공감을 하는 것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은 흰옷을 좋아하고 김치와 쌀밥을 먹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아리랑이라는 한 섞인 노해를 흥얼거리고 유교 의식과 풍수도참 사상에 근거한 장례 문화도 한국인을 구별하는 대표적인 상징이다. 유교는 중국에서 발원했지만 한반도에서 토착신앙과 융합되며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했다.

넷째, 근대론은 민족주의와 민족은 산업자본주의의 지역적 불평등, 계급 갈등 등 사회적, 경제적 요소로부터 출현했다고 강조한다. 16~18세기 유럽 절대군주의 중앙집권화 산물로 민족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서양의 주류 이론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공화국 형태의 새로운 프랑스 민족이 탄생했다. 기사와 같은 특정 계급만 전쟁에 참여하는 중세와 달리 국가의 운명을 건 전면전이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민중(民衆)의 협력이 필요해 일반인에게도 권리를 부여하고 정치적 대표성을 인정한 것이다. 권리를 자중하려면 의무도 같이 부담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프랑스 황제인 보나파르트 나폴레옹(Bonaparte Napoléon)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유럽 대륙을 통합하고 러시아까지 영토를 화장하려는 야욕을 부리다 좌절됐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재빠르게 동원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민족이라는 일체감이었다.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이 재빠르게 제국주의(Imperialism)를 정립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공동체 유대감이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민족의 형성요인과 목표... 계급투쟁의 현실 속에서 생존을 위한 방안으로 민족 개념 부상

한국을 포함해 서구의 다수 역사학자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근대에 정립됐다는 근대론을 지지한다. 민족은 제국주의의 팽창과 식민지에서 독립 운동을 촉발시켰다.

유럽 국가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 민족을 내세워 강력한 응집력을 활용해 제국주의를 부흥시켰다. 제국주의의 희생양을 전락했던 민족은 시간이 지나면서 민족의식을 일깨우며 착취와 억압에 저항했다.

근대 이후만 보더라도 거대 제국이 민족 분열로 붕괴되거나 혹은 다수 국가가 민족을 기반으로 통일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가 독립하고 오스트리아제국이 개별 국가로 분열되는 과정이 이를 증명한다.  

도시국가 중심의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된 국가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민족이라는 정체성이었다. 이탈리아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도시국가로 분리돼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그렇다면 민족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결집되고 융성하는지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민족은 국가에 대한 권위 의식 형성, 전쟁을 통한 결집, 자본주의의 발전 등의 요인으로 형성됐다고 봐야 한다.

우선 근대 이후 국가가 중요한 권위체로 부상하며 국가에 순응하는 국민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중세까지는 국가보다 특정 가문이나 왕실이 국가라는 존재보다 더 중요한 통치 도구였다.

세습을 통해 유지되는 왕조는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변함없는 충성을 바칠 대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대항해의 시대와 중상주의(mercantilism)로 왕실보다 더 막강한 권력과 부를 축적한 가문이 등장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국가 간 전쟁도 특정 가문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보다는 절대 다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돈을 받고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소수의 기사가 벌이는 전쟁에 대한 일반 민중의 관심을 적었다.

어느 가문이 권력을 쟁취하든 자신들의 인생은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총력전으로 변질된 전쟁은 소수 왕족이나 귀족의 이해관계보다는 국민 모두의 일상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다음으로 중세 이후 전쟁에 일반 민중을 동원하면서 결속력이 강화됐다.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 왕정을 붕괴시켰고 일반 시민 위주의 공화정이 탄생하도록 만들었다. 전쟁을 통해 국가를 건설하면서 일체성을 강조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기 가장 적합한 도구다. 대규모 토지나 다수 노예를 소유하지 못하는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부를 축적할 기회는 많지 않다.

무력과 살육을 활용한 약탈만큼 확실한 방법을 찾기란 어렵다. 전쟁은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하지만 권력자나 일반인 모두 그럴만한 가치도 충분하다고 믿는 이유다.

영국, 제정러시아, 일본의 왕실이 식민지를 개척하고 관리와 상인을 파견해 식민지 이권을 나눠준 것도 전쟁에 동원돼 희생한 국민에 대한 보답 차원이라고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본주의의 발전은 전통 공동체의 해체를 불러왔으며 경제적 개인주의를 진전시켰다. 1차 산업인 농업, 목축, 수산업 모두 공동체의 공동 노동을 통해 효율성을 높이고 생산성을 극대화한다.

하지만 2차 산업은 철저한 분업을 통해 개별 노동자만으로 충분하게 작동하는 경제체제다. 자본주의는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와 노동을 제공하는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계급을 만들었다.

초기 자본주의가 극심한 혼란을 겪었던 이유는 자본가와 노동자계급의 극단적인 이해 갈등과 양극화가 심화되었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자본을 투입한 대가로 초과 이윤을 요구했고 노동자는 적정 수준의 임금을 받길 원했다.

개인주의가 팽배해 사회적 갈등을 초래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통합적 구심력이 필요했다. 대부분의 일반 개인은 자본가 계급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속했으므로 내부 경쟁에서 생존할 방안을 찾는 것도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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