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32. 동남아에 방치된 한인 2세... 베트남전쟁으로 라이따이한 다수 생겼지만 정부 무관심
1980년대부터 코피노가 발생하며 사회 문제로 부상한 필리핀... 김영삼정부에서 노력했지만 성과는 미진
민진규 대기자
2026-09-21
2000년대 이후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 감소 문제가 심각해지자 중국, 독립국가연합(CIS) 등지에서 교포를 데려오자는 논의가 활발해졌다.

실제 조선족이라고 불리던 재중 동포의 귀국이 급증했다. 재중 동포의 주요 거주인 동북 3성의 교포사회가 붕괴될 정도로 인구 유출은 가속화됐다.

당시 일부 전문가는 베트남, 필리핀, 태국 등 동남아시아 국가에 있는 한인 2세가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베트남은 전쟁에 파견된 군인과 현지 여성과 사이에서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騾大韓)이라고 불리는 한국계 베트남인이 생겨났다.

관광이나 사업을 목적으로 동남아시아를 방문하는 한국인이 증가하며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한국인 2세가 많이 태어났다. 문제는 한국인 아버지가 자녀의 양육을 포기한다는 점이다.

자녀를 버리고 한국으로 도주하거나 연락을 단절하는 사례가 급증하지만 국가 차원의 대책은 없다. 모두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며 정부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있다.


▲ 전쟁으로 폐허가 된 베트남 사이공 시가지 전경 [출처=위키피디아]


◇ 베트남전쟁으로 라이따이한 다수 생겼지만 정부 무관심... 노무현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 노력

베트남전쟁은 1955년부터 1975년까지 20년 동안 이어진 내전이다. 프랑스와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남베트남과 사회주의를 숭배한 북베트남은 서로를 부정하며 통일을 명분으로 내전을 일으켰다.

대한민국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이후인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31만2853명의 군인을 파견했다. 군인뿐만 아니라 각종 인프라 공사 현장, 군부대 관련 업무에 연관되어 거주한 한국인의 최대 2만 명에 달했다.

베트남에 임시로 거주하던 한국인 중 일부는 현지 베트남 여성과 결혼 혹은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한국에 결혼한 부인이 있는 남성도 일부 포함돼 있었다.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라이따이한(Lai Đại Hàn)’으로 불렀다.

베트남어로 ‘라이(Lai)’는 ‘오다’라는 의미를 가진 한자 ‘래(來)’를 말하며 경멸조로 ‘혼혈’을 부를 때 사용한다. ‘따이한’은 ‘대한(DAIHAN)’을 베트남어로 표현한 것이다.

특히 전쟁이 끝나 한국군이 철수하고 한국이 지원했던 남베트남이 북베트남에 멸망하면서 한국계 2세는 ‘적군의 아이’로 냉대받았다. 통일 베트남이 자유주의 진영과 갈등하며 라이따이한에 대한 관심도 묻혔다가 한-베트남 교류 증대로 수면 위로 부상했다.

남베트남 정부는 무능했을 뿐 아니라 부정부패로 정권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베트남 여성은 한국인과 결혼하면 나라가 망해도 한국으로 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한국인과 결혼하면 단기적으로 경제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신분 보장도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베트남 철수가 결정된 이후 베트남 부인과 자녀를 데리고 귀국한 사례는 거의 전무했다.

1970년대만 하더라도 단일민족주의의 편견을 가진 남성이 외국인 여성을 데리고 한국으로 귀국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정부는 공식적으로 라이따이한의 숫자를 집계하지 않았다. 민간단체는 최소 1만 명에서 최대 3만 명 수준으로 추정하고 있다.

2006년 노무현정부는 “라이따이한이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기를 원하면 한국인 아버지가 친자관계 확인을 거부하더라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부모와 찍은 사진 등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단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자본주의 국가 출신의 외국인과 같이 찍은 사진을 보관하던 여성도 많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1987년부터 미국 군인과 베트남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2세에 대해 인도주의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2세와 가족의 이주를 허용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미국계 2세도 3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숫자는 집계되지 않았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1980년대부터 코피노가 발생하며 사회 문제로 부상한 필리핀... 김영삼정부에서 노력했지만 성과는 미진

필리핀은 1565년부터 1898년까지 333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를 거쳤다가 다시 미국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군이 주둔하다가 1946년 7월 4일 독립했다. 하지만 군사력이 미약해 미군에 국방을 의존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필리핀은 스페인, 미국, 일본 등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외국인과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지 않았다. 한국인 남성과 필리핀 여성 사이에 태어난 2세는 코피노(Kopino)라고 부른다.

한국인을 뜻하는 ‘코리안(Korean)’과 필리핀인을 의미하는 ‘필리피노(Filipino)’의 합성어다. 특히 ‘~노(no)’는 혼혈아에 주로 사용된다. 필리핀에는 한국계 뿐 아니라 일본계 혼혈아도 많다.

1970~80년대 일본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일본 남성이 업무나 관광 목적으로 필리핀을 많이 방문했다. 현지 여성과 결혼이나 동거를 하면서 2세가 태어났는데 이들을 자피노(Japino)라고 불렀다. 자피노는 약 10~20만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인이 대거 필리핀으로 진출한 시기는 1980년대 후반이다. 대기업이 세계로 나가고 어학연수의 경험이 있는 취업생에게 우대하며 미국보다 저렴한 필리핀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필리핀은 타갈로그어라는 토착어가 있지만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미국이 식민지 경험으로 전 국민의 대다수가 영어로 소통이 가능할 정도이다. 인도와 마찬가지 상황인 셈이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이나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가기 어려운 대학생의 방문도 급증했다. 대학생이 아닌 일반인도 해외 출장, 여행 등으로 방문해 성매매 등을 통해 코피노를 만들었다.

한국인 남성도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기간 관계를 유지하다가 여성이 임신하면 잠적하는 수법으로 책임을 회피했다. 일본은 한국보다 혼혈아에 대한 배타심이 강해 문제의 심각성을 더했다.

전문가들은 코피노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가난으로 성매매로 생계를 꾸리는 여성의 증가. 인구의 대부분이 카톨릭 교도로 낙태를 금기시하는 문화, 피임 도구에 대한 인식 부족 및 기피, 한국인 남성의 책임 의식 빈약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한다.

1998년 퇴임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11년 2월 필리핀 세부를 방문해 코피노를 위한 재단을 설립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 파병해준 필리핀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도 코피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민간단체는 부모의 국적이 확인된 자피노에게 일정한 수준의 교육을 제공한 후 일본 취업을 지원한다. 노인 돌보미, 간호조무사, 건설 노동자 등으로 단순 업무이지만 이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민간단체의 예산은 일본 기업이 후원한다.

일본 정부는 2008년 국적법을 개정해 자피노가 일본 국적을 취득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저출산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산업계에서 노동력 부족 상태가 지속되며 인구 증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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