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38. 한국의 이민 확대 필요성 및 1970년대 정책... 재외동포청 출범으로 해결하기 어려워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재일동포의 고국 방문 확대... 주력산업의 경쟁력 추락과 공동체 파괴 대응하려면 이민자 필요
민진규 대기자
2026-10-22 오전 12:16:31
인류는 원시 공산사회에서부터 더 나은 삶을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동했다. 국경선이 획정된 고대 국가가 성립된 이후에도 안전하고 풍요로운 땅을 찾기 위한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고대 국가의 권력자도 인구의 증가, 새로운 문화의 수용, 우수 인재의 확보 등을 이유로 이주민의 유입을 반대하지 않았다.

고대나 현대 국가 모두 강대국이 되기 위한 조건을 충족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인다. 유럽인이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가장 성공적인 이주 모델을 정립한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위험을 감수하고 미개척지를 개간할 이주민을 유인하기 위해 파격적인 정책을 꾸준하게 창안했다. 국가가 이주민을 적극 수용해야 하는 이유는 알아보자.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주력산업의 경쟁력 추락과 공동체 파괴 대응하려면 이민자 필요... 재외동포청 출범으로 해결하기 어려워

한민족은 1948년 남한 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이후 급격한 경제성장으로 풍요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경제 규모의 확대에 따라 증가하던 인구는 저출산으로 인구 감소를 우려해야 하는 처지로 몰렸다.

1980년대부터 지독한 남아선호 사상이 다자녀로 이어진다고 판단한 정부는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잘 낳아 기르자’ 는 구호를 외쳤다.

불과 3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인구 감소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다. 지난 20여 년 동안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수백조 원을 투입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성과를 논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처참한 수준이다. 출산율은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오히려 더 낮아졌다. 급기야 2022년 출범한 윤석열정부는 이민청을 새로 만들어 이민자를 통해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발표했다.

2023년 6월 한인 디아스포라를 관리할 재외동포청은 출범했지만 이민청은 걸음마도 떼지 못했다. 여당인 국민의힘과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이민청 설립에 대해 이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석열정부가 야당과 협치보다는 대결 구도를 유지한 것도 한몫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정부가 이민에 대해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름 열심히 추진하려고 시도했지만 정책 방향조차 잡지 못하고 무너졌다.

우리나라 정부는 1973년부터 중국과 소련 등 공산권에 거주하는 동포의 귀환사업을 추진했다. 이들은 일제 식민지 당시에 일자리를 찾아 자발적으로 이동했거나 강제로 끌려갔다가 해방 이후에도 돌아오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을 이탈한 주민이 한국으로 입국하고 있지만 인구 감소를 역전시킬 정도로 큰 규모는 아니다. 재중동포를 포용하고 동남아시아 결혼 이주자를 받아들여도 큰 효과는 없는 상황이다.

순혈주의와 혈족주의를 강조하며 단일민족을 부르짖고 혼혈아와 외국인에게 배타적이었던 사람조차도 인구 감소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인구 감소는 한국이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는 산업의 추락을 의미할 뿐 아니라 공동체를 해체하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의 이민정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 재일본대한민국민단(在日本大韓民国民団) 로고


◇ 1970년대 공산권 거주 동포에 대한 국내 이주 노력...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재일동포의 고국 방문 확대

한국 정부는 1973년 6월 23일 ‘평화통일 외교정책’을 발표하며 공산권에 거주하는 동포의 귀환사업을 추진했다. 소련의 사할린, 중국,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조총련계 재일동포 등이 대상이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은 사할린으로 외무부는 1969년 약 7900명의 귀환 희망자 명단을 일본 정부에 전달했다. 사할린은 극동 아시아에 위치한 지역으로 탄광개발 등을 위해 한국인을 강제로 배치했다.

일본은 1969년 8월 주일 소련 대사관에 관련 문서를 보냈다. 1972년 4월 주일 한국 대사관과 일본 외무성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협의했다. 소련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처하며 큰 성과는 없었다.

소련은 사회주의의 우수성이 훼손될까 두려웠을 뿐 아니라 인구가 부족한 극동 지역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싶어 했다. 극한의 기후환경에 살고자 하는 사람도 부족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섬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디음으로 중국의 랴오닝성(遼宁省), 지린성(吉林省), 헤이룽장성(黑龙江省) 등 동북 3성에 거주하는 중국 거주 동포는 1974년 9월 1일부터 시작된 공산국가와 우편물 교환업무가 단초를 제공했다. 대한적십자사는 중국 거주 동포와 국내 거주 이산가족의 생사를 확인해줬다.

1975년부터 중국 거주 동포가 귀국을 희망했지만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을 시행한 1978년까지 성과는 없었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 중국 동포는 한국을 방문할 수 있었다. 다수의 동포는 낙후된 동북 지방보다 양질의 일자리가 많은 한국으로 입국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조총련계 재일동포는 1975년 9월 13일 추석 성묘를 위한 방문으로 성사됐다. 조총련은 사회주의 국가인 북한을 고국으로 인정하는 단체다.

국민은 10억 원의 성금을 모금해 ‘조총련계 재일동포 모국방문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이들의 귀향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민족의 최대 명절인 추석 뿐 아니라 신정과 구정, 한식 등에도 방문이 추가됐다.

재일동포 모국방문단 사업이 시작된 지 20년째인 1995년까지 4만5277명이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을 방문한 조총련 소속 재일동포 중 다수가 조총련을 탈퇴하고 남한을 지지하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在日本大韓民国民団)에 가입했다.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1992년 한중수교가 성사됐다. 한국 정부는 이른바 북방외교를 펼쳐 사회주의국가와 교류를 강화했다. 사할린과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의 모국 방문도 자유롭게 되었다.

일본의 조총련은 아직도 북한을 추종하고 있지만 세력이 크게 약화됐으며 소속된 재일동포의 한국 방문도 크게 제한받지 않고 있다. 특히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이후 한국의 위상이 높아져 북한의 선전도 전혀 먹히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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