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07. 디아스포라의 역할과 성공 사례... 그리스 독립전쟁과 중화민국 건국에 기여한 디아스포라
경제적 이득 제공을 통해 거주국 경제 활성화에 기여... 고국이 재난과 전쟁을 극복하도록 모금 활동 추진
민진규 대기자
2026-06-24
인류는 원시사회부터 식량을 확보하고 자연재해를 피하기 위해 이동 생활을 영위했다. 양호한 기상 조건과 비옥한 토지가 풍부한 지역은 이주민이 눈독을 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주자가 기존 정착민으로부터 환영받으려면 생활환경을 개선하거나 외적의 침입에 공동으로 대응하는 등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태어난 국가에서 체득한 다양한 경험, 지식, 기술을 가져와 정착한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

이민자는 새로 옮긴 국가에서 노동자, 학생, 기업가, 예술가 등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민자가 현지인의 경제적 여건을 개선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단기간에 판단하기 어렵다.

정착지에서 생활하지만 고국과 강력한 관계를 유지하며 양국의 발전에 기여하기도 한다. 디아스포라가 거주국에 도움을 제공한 사례와 역할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중국에서 후퇴해 대만을 건국한 장제스 집무실 전경 [출처= iNIS]


◇ 그리스 독립전쟁과 중화민국 건국에 기여한 디아스포라... 싱가포르 건국을 주도한 화교 네트워크

15세기 동로마로 불리던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제국에 멸망한 후 그리스는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프랑스 대혁명과 서유럽에서 일어난 계몽주의 사상에 영감을 얻은 그리스인은 1821년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계몽주의는 전근대적 권위와 전통을 비판하며 이성주의와 경험주의로 사회를 개혁하려는 사회 운동이다. 인간의 이성에 기반해 현실을 개혁할 수 있다고 봤다. 프랑스와 독일에서 출발한 계몽주의는 중부 유럽과 동유럽까지 확산됐다.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이집트, 러시아 등에서 무역에 종사하던 그리스인은 고국이 독립하는데 필요한 자금과 정보를 제공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재정 및 군사적 지원으로 독립한 이후에는 해외 거주 그리스인이 신생 국가의 경제, 교육, 문화, 정치 등에 신선한 충격을 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중국인은 영국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일부는 자원병으로 입대했다.

1911년 중국 본토에서 쑨원(孫文)을 지도자로 신하이혁명(辛亥革命)이 발발하고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싱가포르에 거주하는 중국인도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싱가포르 중국인은 대륙의 민족주의 운동의 여파로 중국어 학교를 세워 동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교육 내용은 중국어 방언과 전통적인 유고 개념을 포함한다. 1910년 이후에는 만주족의 변발(辮髮)을 포기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높였다.

1920년 싱가포르 정부는 교육령을 선포해 모든 학교, 교사 및 이사진을 등록하도록 요구했다. 학교의 모든 행위에 대해 정부가 규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영국인은 중국인의 교육수요를 통제하기보다 정식으로 국가 교육시스템에 편입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해외 중국인의 학습을 지원한 화교학교는 1898년 일본 요코하마에 설립된 다퉁(大同)학교가 처음이다. 요코하마는 중국에서 가깝고 교통이 편리해 일본에 거주하는 화교가 많이 모여들었다.

일본에 거주하는 화교는 자녀들에게 중국 문화를 가르치고자 학교 설립을 시도한다. 1897년 일본을 방문한 민족 지도자인 쑨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쑨원은 화교가 일본의 신식 문물과 근대화 과정을 배워 본토의 혁명에 도움을 제공하길 바랬다.

쑨원이 화교학교의 명칭을 ’중시(中西)학교‘로 제안했지만 다퉁학교로 정해졌다. 다퉁(大同)은 고대 중국에서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로 사서삼경으로 불리는 유고 경전 중 하나인 예기(禮記)에도 나오는 용어다. 유럽인이 주장하는 유토피아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싱가포르를 포함해 세계 각지에 세워진 화교학교는 중국인의 정체성을 키우고 역사와 문화를 배우는 요람이었다. 현재에도 전 세계에 거주하는 화교에는 현지에서 자체 학교를 건립해 자녀들에게 중국인의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독려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인도의 초대 총리인 자와할랄 네루(Javāharlāl Nehrū)는 해외 인도인을 향해 ‘인도를 조속히 잊고 주재국에 통합되도록 노력해 주재국의 발전에 기여하라’고 강조했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살던 인도인에게 흑인과 협력해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동참해 백인 정권을 타도하라고 요구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백인, 흑인, 인도인, 유색인종을 구분해 생활 구역을 나눴다.

유색인종에게 투표권을 부여하지 않았으며 교육의 기회도 박탈했다. 1994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넬슨 만델라가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소수의 백인이 다수의 흑인이 정치세력화하지 못하도록 사전에 규제한 인종차별정책이다.

네루는 비폭력, 평화주의자였던 마흐트마 간디(Mahatma Gandhi)와 달리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회적 불의와 모순에 저항하는 민중운동을 주도했다. 다른 국가의 지도자 중 네루처럼 해외 디아스포라에 저항을 강조한 사람은 없었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출처=엠아이앤뉴스]


◇ 경제적 이득 제공을 통해 거주국 경제 활성화에 기여... 고국이 재난과 전쟁을 극복하도록 모금 활동 추진

디아스포라는 새로운 기술과 재산을 투입할 뿐 아니라 무역 거래에 도움을 준다. 이민자는 모국과 정착지에 대한 경제 관련 지식이 풍부해 교역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또한 경제적 목적으로 이주한 경우라면 정착지에서 번 돈을 모국의 가족을 위해 송금한다.

모국과 무역을 추진하고 있다면 교역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기 위해 시설 투자를 단행한다.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고 가난한 지역의 경제적 자립과 부흥에 큰 도움을 주게 된다.

해외 거주하는 인도인은 유창한 영어 구사 능력, 광범위한 인맥 등을 활용해 인도와 거주국의 국경 간 무역과 투자를 이끌어가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인도가 중국을 대체하는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매김하는데 절대적으로 기여한 것도 해외 인도인 디아스포라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디아스포라의 특징은 신용과 신뢰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집단가치를 숭상하지 않는 구성원은 퇴출하는 방식으로 응징한다. 신분제가 강한 중국인과 인도인의 공동체 내부 규율은 강한 편이다.

육지에서 상행위를 수행하는 상인보다 해상 무역에 종사하는 상인은 집단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공동체 권위에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한다. 해상 무역은 기상의 변화에 따라 항해의 성공이 결정되며 항해 도중에 해적, 선상 폭동 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해외에서 경제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유대 상인, 중국의 학가(客家, Hakka). 인도의 파르시(Parsi)는 신용을 가장 우선시했다.

이들이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동안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노하우는 자식에게 근면 성실하고 절약 정신이 몸에 배도록 만들어 정신적, 물질적 기반을 물려주는 것이다.

해외에 있는 디아스포라는 모국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스라엘과 인도는 경제적 위기를 맞이해 디아스포라 채권(Diaspora Bonds)을 발행한다. 이스라엘은 1951년 이후 국가가 힘들 때마다 디아스포라 채권을 팔았다.

2023년 10월 7일 가자지구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2년 이상 이어진 전쟁에 소요된 비용은 약 US$ 600억 달러가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 정부는 2024년 3월 80억 달러 규모의 국채를 국내외 투자자에게 판매했다. 해외 유대인에게 판매한 ‘디아스포라 채권’도 포함됐다. 이스라엘 국내보다 높은 이자율을 지급한다는 논란이 제기됐다.

인도는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에 디아스포라 채권을 판매했다. 이후에도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발행해 100억 달러 규모를 넘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인도인이 주로 구매했다.

2011년 국가 재정위기를 맞은 그리스 정부도 30억 달러 규모의 디아스포라 채권을 발행했다. 정부의 채권 신용등급은 투기 등급 수준으로 추락해 채권을 구입할 투자자가 전무했다.

이때 그리스에 구원의 손길을 뻗친 단체가 미국 내 최대 그리스인 단체인 해외그리스연합회(SEA)였다. 미국 거주 그리스계 인구가 300만 명에 달해 1인당 1000달러만 내도 충분하다고 믿었다.

한국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에 봉착했을 때 해외에 거주하는 한인은 금을 모아 기부하는 방식으로 고국을 도았다. 한국 정부가 국채를 발행할 여건조차 확보하지 못한 점도 고려했다.

- 계속 - 
저작권자 © 엠아이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기획·특집 분류 내의 이전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