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06. 디이스포라의 정체성 확보 방안... 언어를 포기하는 민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단일 종교가 디아스포라 유지에 도움... 종교적 갈등과 현지 종교 수용성에 따라 이주민 생존 결정
중국의 고사성어인 수구초심(首丘初心)은 ‘여우가 죽을 때 고향을 생각하며 머리를 고향 쪽으로 향한다’는 의미로 고사에서 비롯됐다.
인간도 여우와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살면 태어나고 자랐던 장소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생기게 된다. 고향이나 고국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지만 정체성(identity)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하며 정서적 혼란이 초래된다.
고국에 대한 향수와 소속감을 고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언어, 종교, 의복, 음식, 장례 풍습 등이다.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현지 시장 전경 [출처= iNIS]
◇ 유대인은 히브리어로 다른 국가의 디아스포라와 연결... 언어를 포기하는 민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어다. 그리스인은 고대부터 지중해 연안 도시와 인도에 걸친 교역로를 장악하며 그리스어가 주류 언어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왕국을 건설한 악렉산더가 사망한 이후 형성된 헬레니즘 왕조는 그리스 전통문화를 표방하며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내분과 갈등으로 멸망했고 그 공백을 메우며 등장한 로마제국은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소통할 공용어로 그리스어를 지정했다.
로마 시대에 그리스어는 이른바 ‘랑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로 인정받았다. 프랑크(Frank)는 유럽인이 아랍인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지중해에서 무역업을 영위하는 상인이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라는 의미로 정착됐다.
AD 7세기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은 중세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지중해에서 무역업을 하는 상인, 관료, 이주민이 자연스럽게 그리스어를 사용한 계기를 제공했다.
15세기 중엽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에 의해 멸망하자 그리스인은 고전 그리스 저작물을 아랍어로 번역해 이슬람 철학과 과학이 발전할 토대를 제공했다.
21세기 현재에도 지중해와 흑해 연안 도시에 그리스인 디아스포라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언어의 힘이다. 동아시아에서 역사와 철학을 포함한 고전을 기록한 중국어가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지식과 학문을 중시해 자녀 교육에 열정을 갖고 있었다. 자녀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며 유대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히브리어는 다른 국가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연결하는 도구로 작용했다.
유대인과 달리 해외로 이주한 인도인도 사회적 차별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현지어를 적극 배웠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계약 노동자와 상인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국에서 사용하던 텔루구어(Telugu language)를 배웠다. 텔루구어(Telugu language)는 인도 동부 안드라프데시시주와 텔랑가나주 등에서 사용하는 공용어다. 인도에서 6600만 명 정도가 사용하며 전 세계적으로 8000만 명이 모국어로 인정한다.
타밀어(Tamil language)는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스리랑카과 싱가프로에서도 공용어로 지정돼 있다. 약 7400만 명이 사용한다.
아프리칸스어(Afrikaans)는 남아리카공화국과 나미비아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다. 16~17세기 네덜란드 이주민이 사용하던 네덜란드어를 변형해 만들었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도구에 해당된다. 유대인은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히브리어로 된 탈무드(Talmud)를 공부한다.
탈무드는 ’위대한 연구‘라는 뜻으로 5000년 동안 걸쳐 유대인의 생활을 지켜온 규범이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철학이나 규범일 뿐 아니라 자녀를 가르키는 교과서로서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해외로 이주한 한인이 한글을 잊지 않기 위해 교과서를 만든 과정은 눈물겹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한민족은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자손들에게 물려줄 한글로 된 역사서조차 제대로 없기 때문이다.
해외로 이주한 한인이 2~3세로 넘어가면서 한글을 잊어버리는 것도 공부할 교재가 마땅찮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코란, 기독교의 성경, 불교의 불경 등과 같이 한글로 기록된 경전도 존재하지 않는다.
◇ 단일 종교가 디아스포라 유지에 도움... 종교적 갈등과 현지 종교 수용성에 따라 이주민 생존 결정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자연을 숭배하며 종교의식을 발전시켰다. 디아스포라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유대교를 중심으로 단결했지만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며 일부 유대인은 현지에서 종교적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개종을 선택했다.
역사가 오래된 그리스 디아스포라는 정교회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확보했다. AD 4세기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에서 발원한 그리스도교를 도입하며 유럽에 종교적 기반이 구축됐다. 동로마제국으로 불렸던 비잔티움 제국은 정교회를 국교로 인정했다.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투르족에 의해 멸망하고 이슬람교의 영향력에 놓이자 다수 그리스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근대에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할 때 그리스 정교회가 중심에 서 있었다.
정교회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민족주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의 잔악한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천도교와 대종교가 부흥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도인은 힌두교를 믿으며 해외에서도 힌두교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결정한다. 인도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로 구성돼 단일 정체성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힌두교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해외에 거주하는 인도인은 이슬람교도가 성지를 순례하는 것처럼 고국에 있는 사원을 방문하고 있다. 힌두교는 성지가 다수이고 신의 숫자가 너무 많지만 그렇다고 종교의 기능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
명확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중국인은 죽은 조상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사당을 만들고 조상을 섬기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유지한다.
위패(位牌)는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어 그의 혼을 대신하는 상징물이며 나무로 제작한다. 해외에 있는 중국인 디아스포라가 현지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인은 물질주의, 상거래 관습, 식습관, 세속적 종교관 등으로 이슬람교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슬람교는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며 돼지고기를 금지한다. 반면에 중국인은 상거래 시 이자를 중시하며 돼지고기를 가장 좋아한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이 지역 사회와 동화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며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았던 이유다. 인도네시아에서 원주민과 종교적 갈등이 생겨 중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반면에 가장 많은 중국인이 거주하는 태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어 종교적 갈등은 없었다. 중국인은 고대로부터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거부감이 없었다.
태국은 중국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담당해 교류가 많아 중국인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필리핀은 가톨릭 신자가 인구의 85%를 차지하며 불교를 믿는 중국인에게 배타적이지 않았다.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단일 종교가 없던 한인은 해외에서 교회, 사찰 등을 중심으로 모였다. 하와이와 멕시코 등에 이주했던 초기 노동자는 교회에서 도움을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한 것도 교회였다.
반면에 중국과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은 불교를 믿고 사찰을 세웠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 이주한 한인도 신사를 방문해 종교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다.
불교는 한반도에 유입된 이후 한국의 토착 신앙을 적극 수용해 일반 민중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불교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생활양식 곳곳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다.
- 계속 -
인간도 여우와 마찬가지로 고향을 떠나 살면 태어나고 자랐던 장소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이 생기게 된다. 고향이나 고국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지만 정체성(identity)을 유지하는 경향이 강하며 정서적 혼란이 초래된다.
고국에 대한 향수와 소속감을 고취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은 언어, 종교, 의복, 음식, 장례 풍습 등이다.
▲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현지 시장 전경 [출처= iNIS]
◇ 유대인은 히브리어로 다른 국가의 디아스포라와 연결... 언어를 포기하는 민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언어다. 그리스인은 고대부터 지중해 연안 도시와 인도에 걸친 교역로를 장악하며 그리스어가 주류 언어로 자리매김하도록 만들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중심으로 왕국을 건설한 악렉산더가 사망한 이후 형성된 헬레니즘 왕조는 그리스 전통문화를 표방하며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내분과 갈등으로 멸망했고 그 공백을 메우며 등장한 로마제국은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소통할 공용어로 그리스어를 지정했다.
로마 시대에 그리스어는 이른바 ‘랑구아 프랑카(Lingua franca)로 인정받았다. 프랑크(Frank)는 유럽인이 아랍인을 지칭하는 용어이지만 지중해에서 무역업을 영위하는 상인이 소통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라는 의미로 정착됐다.
AD 7세기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은 중세 그리스어를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지중해에서 무역업을 하는 상인, 관료, 이주민이 자연스럽게 그리스어를 사용한 계기를 제공했다.
15세기 중엽 비잔티움 제국이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에 의해 멸망하자 그리스인은 고전 그리스 저작물을 아랍어로 번역해 이슬람 철학과 과학이 발전할 토대를 제공했다.
21세기 현재에도 지중해와 흑해 연안 도시에 그리스인 디아스포라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언어의 힘이다. 동아시아에서 역사와 철학을 포함한 고전을 기록한 중국어가 생명력을 잃지 않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유대인은 역사적으로 지식과 학문을 중시해 자녀 교육에 열정을 갖고 있었다. 자녀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며 유대인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히브리어는 다른 국가에 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와 연결하는 도구로 작용했다.
유대인과 달리 해외로 이주한 인도인도 사회적 차별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현지어를 적극 배웠다. 영국 식민지 시절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 계약 노동자와 상인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국에서 사용하던 텔루구어(Telugu language)를 배웠다. 텔루구어(Telugu language)는 인도 동부 안드라프데시시주와 텔랑가나주 등에서 사용하는 공용어다. 인도에서 6600만 명 정도가 사용하며 전 세계적으로 8000만 명이 모국어로 인정한다.
타밀어(Tamil language)는 인도 남부 타밀나두주에서 주로 사용되지만 스리랑카과 싱가프로에서도 공용어로 지정돼 있다. 약 7400만 명이 사용한다.
아프리칸스어(Afrikaans)는 남아리카공화국과 나미비아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다. 16~17세기 네덜란드 이주민이 사용하던 네덜란드어를 변형해 만들었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를 넘어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도구에 해당된다. 유대인은 정체성을 잃지 않으려고 히브리어로 된 탈무드(Talmud)를 공부한다.
탈무드는 ’위대한 연구‘라는 뜻으로 5000년 동안 걸쳐 유대인의 생활을 지켜온 규범이다. 공동체를 유지하는 철학이나 규범일 뿐 아니라 자녀를 가르키는 교과서로서도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해외로 이주한 한인이 한글을 잊지 않기 위해 교과서를 만든 과정은 눈물겹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앞선다. 한민족은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자손들에게 물려줄 한글로 된 역사서조차 제대로 없기 때문이다.
해외로 이주한 한인이 2~3세로 넘어가면서 한글을 잊어버리는 것도 공부할 교재가 마땅찮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코란, 기독교의 성경, 불교의 불경 등과 같이 한글로 기록된 경전도 존재하지 않는다.
◇ 단일 종교가 디아스포라 유지에 도움... 종교적 갈등과 현지 종교 수용성에 따라 이주민 생존 결정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자연을 숭배하며 종교의식을 발전시켰다. 디아스포라는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유대교를 중심으로 단결했지만 다양한 분파가 존재하며 일부 유대인은 현지에서 종교적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개종을 선택했다.
역사가 오래된 그리스 디아스포라는 정교회를 중심으로 정체성을 확보했다. AD 4세기 로마제국이 이스라엘에서 발원한 그리스도교를 도입하며 유럽에 종교적 기반이 구축됐다. 동로마제국으로 불렸던 비잔티움 제국은 정교회를 국교로 인정했다.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투르족에 의해 멸망하고 이슬람교의 영향력에 놓이자 다수 그리스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근대에 그리스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추진할 때 그리스 정교회가 중심에 서 있었다.
정교회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고 민족주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일본의 잔악한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해 한반도에서 천도교와 대종교가 부흥한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인도인은 힌두교를 믿으며 해외에서도 힌두교는 단순한 신앙을 넘어 생활방식과 가치관을 결정한다. 인도는 다양한 민족과 언어로 구성돼 단일 정체성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힌두교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해외에 거주하는 인도인은 이슬람교도가 성지를 순례하는 것처럼 고국에 있는 사원을 방문하고 있다. 힌두교는 성지가 다수이고 신의 숫자가 너무 많지만 그렇다고 종교의 기능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
명확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중국인은 죽은 조상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사당을 만들고 조상을 섬기는 방식으로 정체성을 유지한다.
위패(位牌)는 죽은 사람의 인적 사항을 적어 그의 혼을 대신하는 상징물이며 나무로 제작한다. 해외에 있는 중국인 디아스포라가 현지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중국인은 물질주의, 상거래 관습, 식습관, 세속적 종교관 등으로 이슬람교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이슬람교는 이자를 받지 못하게 하며 돼지고기를 금지한다. 반면에 중국인은 상거래 시 이자를 중시하며 돼지고기를 가장 좋아한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에서 중국인이 지역 사회와 동화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며 크고 작은 사건이 많았던 이유다. 인도네시아에서 원주민과 종교적 갈등이 생겨 중국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반면에 가장 많은 중국인이 거주하는 태국은 불교를 국교로 삼고 있어 종교적 갈등은 없었다. 중국인은 고대로부터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 거부감이 없었다.
태국은 중국인이 동남아시아에 진출하는 교두보 역할을 담당해 교류가 많아 중국인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필리핀은 가톨릭 신자가 인구의 85%를 차지하며 불교를 믿는 중국인에게 배타적이지 않았다.
중국인과 마찬가지로 단일 종교가 없던 한인은 해외에서 교회, 사찰 등을 중심으로 모였다. 하와이와 멕시코 등에 이주했던 초기 노동자는 교회에서 도움을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한인의 구심점 역할을 담당한 것도 교회였다.
반면에 중국과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은 불교를 믿고 사찰을 세웠다. 식민지 시대에 일본으로 이주한 한인도 신사를 방문해 종교적 수요를 충족할 수 있었다.
불교는 한반도에 유입된 이후 한국의 토착 신앙을 적극 수용해 일반 민중의 삶 속으로 파고들었다. 불교가 단순한 종교를 넘어 생활양식 곳곳에서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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