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27. 중국과 대만의 이산가족 현황과 이슈 ... 2027년까지 대만 통일을 강조하는 중국 정부
대만은 계엄법 폐지하며 이산가족 방문 문제 해결... 대만은 2017년 12월부터 ‘친척 찾기 프로젝트’ 진행
민진규 대기자
2026-09-01 오후 10:35:13
중국은 방대한 영토와 많은 인구를 자랑하며 통일된 왕조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만주족이 세운 청(靑)이 멸망하고 1912년 쑨원(孫文)이 한족 중심의 중화민국을 건국하며 내전에 돌입했다.

‘만주족을 멸하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이른바 멸만흥한(滅滿興漢)을 기치로 건국된 중화민국이 수도를 베이징이 아닌 난징(南京)으로 정한 것도 북부 지역에 군벌이 탄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1920년대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 국공합작군의 군벌과 전쟁, 1930년대 일본과 전쟁,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전쟁 등은 난민이 생길 여지를 만들었다.

1949년 10월 1일 중국 본토에 공산당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며 대규모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공산당은 사회주의를 지향한 반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피했다. 세부적인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대만을 건국한 장제스 총통의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중국 본토와 대만의 이산가족 현황... 2027년까지 대만 통일을 강조하는 중국 정부

중국은 1912년 쑨원(孫文)이 건국한 중화민국이 공산당과 내전에서 패배하며 1949년 12월 대만으로 밀려났다. 대규모 이산가족이 발생한 이유다.

공산당은 1949년 4월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했으며 동년 10월 1일 베이징을 수도로 삼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국민당을 지지하거나 공산당의 통치에 반대하는 국민은 대만이나 영국령 홍콩으로 이주를 선택했다.

1945년부터 1955년까지 약 90~110만 명의 본토인이 대만으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56년 인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본토에서 온 이주민은 약 64만 명으로 조사됐다.

1945년부터 1951년까지 홍콩으로 이주한 본토인도 150만 명이 넘었다. 홍콩의 인구가 60만 명에서 210만 명으로 증가했으며 이주민으로 경제가 크게 활성화됐다.

남부의 최대 상업도시인 상하이(上海)를 중심으로 금융업에 종사하던 이주민은 홍콩을 아시아 금융 허브로 만들었다. 홍콩이 국제무역도시로 성장한 배경에도 남부 상인의 이주가 투영됐다.

중화민국은 대만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계엄령을 선포해 강압적인 군사독재 정치를 펼쳤다. 1972년 미국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양안의 평화를 촉구한 이후 겨우 해빙 무드가 조성됐다.

1979년 미국과 중국이 정식으로 수교하며 중국과 대만의 무력 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의 5세대 지도자인 시진핑(習近平)은 2027년까지 무력으로라도 대만을 통일하겠다며 공언한다.

중국과 대만의 군사력, 경제력의 차이를 고려하면 독립 국가 대만의 미래가 밝은 것은 아니다. 중국과 대만에서 고민거리인 이산가족에 대해 알아보자.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대만은 계엄법 폐지하며 이산가족 방문 문제 해결... 대만은 2017년 12월부터 ‘친척 찾기 프로젝트’ 진행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1979년 고대만동포서(告臺灣同胞書)를 통해 3통(通)을 주장했다. 3통은 통상(通商), 통항(通航), 통우(通郵)로 양안에서 통상, 항공, 우편 등을 허용하자는 방침이다.

중국 최고 지도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은 1980년대 초 대만에 이산가족의 재회를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대만의 장징궈(蔣經國) 총통은 1987년 ‘동원감란 시기 임시조치법’, 일명 계엄법을 폐지했다.

1987년 12월 1일부터 3촌 이내의 친척이 있는 민간인의 대륙 친척 방문을 허용했다. 원칙적으로 현역 군인이나 현직 공무원은 대륙 방문이 금지됐다. 민간인도 방문 횟수가 연간 1회,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체류 기간은 3개월을 초과할 수 없도록 제한했다.

1989년 8월 1일부터 친족의 범위가 3촌에서 4촌으로 확대됐다. 1990년 5월 26일부터 방문 횟수가 연간 1회에서 무제한, 체류 기간은 3개월에서 2년으로 늘어났다.

1990년부터 고위공무원, 군인과 경찰 등 안보 관련 종사자를 제외한 공무원의 대륙 방문을 허용했다. 정치적인 갈등이나 안보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88년 60만 명이 넘는 대만인이 본토를 방문했다. 홍콩의 자료에 따르면 1988년부터 1994년 9월까지 중국을 방문한 대만인은 약 681만 명으로 집계됐다. 홍콩은 대만인의 중국방문 관련 비자나 항공권을 취급했다.

1990년 중국 본토의 가족이 대만을 방문하는 것을 허용했다. 연도별 대륙 방문자는 △1990년 92만5768명 △1994년 115만 명 △1997년 184만8000명으로 증가했다.

대만은 2017년 12월부터 ‘친척 찾기 프로젝트’를 진행해 대륙의 친인척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있다.

편지를 주고 주고받는 사례도 급증했는데 1988년 400만 통에 불과했지만 점차 증가해 1988년부터 1994년 9월까지 약 1억4000만 통이 주인을 찾았다. 1999년에만 1350만 통의 편지가 대륙에서 섬을 오고 갔다.

1989년 6월 양안 간 전화선이 개통됐다. 대만 교통부 산하 국제전신국의 통계에 따르면 1988년 6월부터 1994년 9월까지 전화통화는 약 1억4000만 통을 기록했다. 총사용 시간은 4억4300만 분(分)으로 조사됐다. 동기간 전보는 약 40만 통을 상회했다.

덩샤오핑은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시작한 이후 대만에 비해 1인당 국민소득이 형편없이 낮았지만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부유한 대만인이 본토의 가족을 방문해도 사회주의가 붕괴되지 않을 것으로 믿었다.

대신에 대만인이 고향을 방문해 가족과 친인척에게 돈을 주고 투자도 하라는 주문이었다. 돈이 투자되면 국민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일자리가 늘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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