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24. 남북 이산가족의 현황과 이슈 ... 고령화와 사망자 증가로 인도주의적 해법 필요
해방 이후와 6·25 전쟁으로 생긴 이산가족... 휴전선 인근 주민이 다수를 점유해
지금으로부터 43년 전인 1983년 6월 30일부터 11월 14일까지 138일, 총 453시간 45분 동안 방송했던 KBS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는 전 세계 역사상 가장 긴 생방송으로 기록됐다.
총 10만 건이 넘는 상봉 요청이 접수됐으며 절반에 가까운 내용만 방송됐음에도 1만 명 이상이 가족을 만났다. 6·25 전쟁 이후 생계를 유지하느라 가족을 잊고 살았던 한한 내의 이산가족은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있었다.
한국 내의 이산가족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이산가족은 분단된 지 80년이 된 현재도 해결될 기미가 전혀 없다. 북한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를 한국과 정치적 협상 도구로 악용하고 있다.
현재 남북한 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남북 이산가족은 1945년 한반도 분단, 1950~53년 6·25 전쟁, 남한 주민의 강제납치, 북한이탈주민 등으로 발생 원인이 다양하다. 개별 안건에 따라 해결방안이 다르지만 인도주의 차원에서 어느 하나도 방치할 수 없다는 점은 명확하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이북5도청 청사 전경 [출처=홈페이지]
◇ 남북이산 가족의 정의와 역사...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이탈주민 증가
가족은 ‘혈연, 혼인으로 관계돼 같이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community)’라고 정의된다. 통상적으로 직계혈족과 배우자로 구성되며 인간사회의 기본이 되는 단위로 국가나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통일 이전의 동독과 서독도 이산가족의 상봉을 위해 가족의 개념부터 정리했다. 1963년 ‘서베를린과 동독 간의 통행협정’에서 가족을 ‘부부, 부모, 자녀, 조손, 형제자매, 숙·백부모, 조카, 그들의 배우자’로 한정했다. 조손은 조부모와 손자, 숙·백부모는 숙부와 백부로 숙부는 아버지의 동생, 백부는 아버지의 형을 말한다.
중국과 대만은 쌍방의 이산가족이 고향을 방문하도록 허용하면서 가족을 별개로 규정했다. 중국은 부모, 배우자, 자녀로 한정한 반면 대만은 4촌 이내의 친척까지 확장했다.
중국은 1949년 대륙이 공산화되며 대만으로 이주한 본토인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대만은 중국과 달리 인도주의 차원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서독과 동독, 중국과 대만이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한국과 북한도 1980년대 들어 관련 이슈를 대화 의제로 삼기 시작했다. 1985년 8월 개최된 제9차 적십자 본회담에서 가족은 ‘헤어질 당시의 가족과 그 이후 출생 자녀’로 합의됐다.
하지만 친척의 범위에 대해서는 남한은 ‘방계 8촌, 처·외가 4촌’, 북한은 ‘남한의 범위 외에 당사자가 요구하는 친척’으로 넓히자고 주장했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북한 체제를 선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 접촉자의 숫자를 늘리길 희망했다.
남북한 이산가족이 누구인지 정의한 법률은 ‘남북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교류촉진에 관한 법률이다. 동법 제2조에 따르면 남북이산가족은 ‘이산 사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현재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과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8촌 이내의 친척·인척 및 배우자 또는 배우지였던 자’로 정의돼 있다. 군사분계선 이남은 한국, 군사분계선 이북은 북한을 말한다.
이러한 개념에 비춰보면 이산가족은 전쟁으로 발생한 실향민, 전쟁 기간 중 강제 납북자 및 자진 월북자. 1953년 정전 협정 이후의 납북자 및 월북자, 북한이탈주민 등이 모두 포함된다.
납북자는 북한이 강제로 끌고 간 남한 주민을 말하며 월북자는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북한으로 올라간 사람이다. 납북자는 6·25 전쟁 기간 중에 주로 발생했지만 휴전 이후에도 어부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납치 사건이 적지 않았다.
북한이탈주민은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이후 북한 지역을 탈출해 남한으로 넘어온 주민을 말하며 일반인뿐만 아니라 공무원, 군인, 외교관 등을 모두 포함한다.
북한의 경제가 극도로 혼란해진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이탈주민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2020년 2월 코로나19로 국가간 이동이 제한되며 탈북자가 급감했다가 2023년 팬데믹(대유행)이 해제된 이후 점차 회복되고 있다.
학자들은 법률에 규정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 이산가족을 ‘재결합으로 배우자, 형제자매의 혈족 및 인척으로서의 신분 관계를 회복·형성하고자 하는 사람’을 모두 포함한다.
▲ 625 전쟁 당시 피난민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해방 이후와 6·25 전쟁으로 생긴 이산가족... 고령화와 사망자 증가로 인도주의적 해법 필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을 필두로 뭉친 사회주의 진영은 극한의 이념대결을 펼쳤다. 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국가는 강대국의 입맛에 따라 영토가 분할됐다.
1945년 2월 개최된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을 대일전에 참전시키기 위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합의했다.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며 1941년 4월 소련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소련 입장에서는 독일과 전쟁에 전념해야 했으므로 동아시아 연해주에서 전쟁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대일전에 참여하는 대가로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길 원했다. 일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으로 분리된 이유다.
북한은 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한 반면에 남한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38도선이 남북한을 분리하는 국경선으로 고착되며 이산가족이 된 사례로 적지 않았다. 북한에 거주하던 사람 중 일부는 소련과 미국은 3년의 신탁통치를 끝내고 철수할 예정이었으므로 분단 상황이 일시적이라고 믿었다. 통제가 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배격한 사회주의 체제를 피해 남쪽으로 잠시 피신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6·25 전쟁은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과 강제 납북자로 수십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특히 해방 이후 5년 동안 북한의 강압적인 통치는 사회주의에 혐오감을 가진 주민을 양산했다.
븍한의 정치체제에 혐오감을 느낀 주민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했다가 후퇴하는 행렬에 동참해 남쪽으로 대규모로 이동했다. 흥남항과 함흥함에서 미군 함정으로 탈출한 주민이 10만 명에 달했다.
남북 이산가족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는 195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월남자는 총 73만5501명으로 전쟁 전 28만3313명, 전쟁 중 45만2188명으로 구성됐다.
199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센서스)에 따르면 이북 출생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40만3000명이었다. 2020년 조사에는 35만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고령자의 사망 등으로 자연 감소가 진행 중으로 추정된다.
1970년 법원이 이북 지역에서 월남한 가족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호적 신고자는 546만3000명이다. 25년이 흐른 1995년 파악한 이산가족은 40만 명으로 급감했다. 많은 사람이 고령이나 질병 등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1970년 기준 남북 이산가족의 현황을 살펴보면 황해도 출신이 136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함경남도 120만 명, 평안남도 113만 명, 평안북도 84만 명, 함경북도 59만 명의 순이었다. 지역별 차이는 남한과의 거리 차이 때문으로 분석된다.
6·25 전쟁 당시에 한반도는 후진적인 농업국가로 자동차, 철도, 도로망 등 이동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다. 대다수 피난민은 걷거나 우마차를 이용해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정확한 지도조차 없고 도로망이 열악해 이동 속도는 더디고 피난길은 고난의 여정이었다.
1952년과 1953년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연감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 납북된 사람은 8만 명을 넘는다. 1955년 대성호 피랍 사건 이후 납북된 사람은 총 3853명이며 2010년 말 기준 미 귀환자는 517명으로 집계됐다.
국군포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유엔(UN)군은 전쟁 당시 국군포로는 약 8만2000으로 추정했지만 북한이 인도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전쟁포로의 송환이 이뤄졌으나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는 송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1977년 10월 국방부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미귀환 국군포로는 1만9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당시에 실종자는 4만1971명이지만 전사 처리자가 2만2562명, 생존 추정자는 351명이다.
남한 정부는 미귀환 국군포로의 송환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북한 정부도 이들을 전후 복구사업에 투입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1994년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가 북한을 탈출해 귀국하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됐다. 2010년까지 총 80명의 국군포로가 탈북해 남한에 돌아왔다.
조창호 소위 이후에 귀국한 국군포로 중 누구도 정부의 도움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했다. 북한에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남한 가족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들의 탈출을 도왔다.
2010년 기준 북한에 약 560명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고 집계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이미 고령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당시에 20대라고 하더라도 이미 70년이 넘어 9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직후 ‘특수이산가족’ 또는 ‘광의의 이산가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비전향장기수, 납북자, 미송환 국군포로, 월북자, 탈북자 등도 이산가족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1세대 이산가족이 사망하면 가족을 찾으려는 2세가 많지 않게 된다. 이산가족은 남북한의 통일 이전에 자유롭게 왕래하고 서신을 교환하는 정도로도 만족한다. 하지만 북한은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고 있어 고령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의 가슴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이산가족 신청 생존자 및 사망자 통계... 휴전선 인근 주민이 다수를 점유해
2009년 제정된 남북이산가족 생사 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은 이산가족을 ‘이산의 사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현재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과 군사 분계선 이북 이역으로 흩어져 있는 8촌 이내의 친척·인척 및 배우자 또는 배우자이었던 자’로 규정했다.
2025년 1월 31일 기준 남북이산가족찾기 교류 현황에 따르면 전체 신청자는 13만4410명으로 조사됐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신청자는 전월 대비 119명 증가, 생존자는 전월 대비 136명 감소, 사망자는 전월 대비 255명 증가로 나타났다. 연령대별 생존자와 사망자는 다음과 같다.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후 73년이 지나면서 가족과 헤어진 사람은 최소 70대 이상으로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80세 이상의 비율이 전체의 67.8%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도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80세 이상의 사망자가 전체의 74%를 넘을 정도로 높아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족 관계별로 보면 부부·부모·자녀를 찾는 사람의 비율은 39.1%, 형제자매를 보고 싶어 하는 이산가족은 40.0%, 3촌 이상의 친척을 만나고자 하는 비율도 20.8%로 각각 집계됐다.
이산가족의 출신 지역을 구분하면 황해도 19.7%, 평안남도 10.3%, 평안북도 5.8%, 함경남도 9.0%, 함경북도 3.1%, 경기도 3.1%, 강원도 1.5%, 기타 47.5%로 나타났다.
남한과 북한이 분리된 38도선 인근 지역은 황해도, 평안남도의 비율이 30%로 많은 점도 특이하다. 6·25 전쟁이 오래 가지 않고 남북통일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고 38선 인근 지역의 국민이 남쪽으로 피난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는 남한과 긴 이동 거리 등으로 피난이 용이하지 않았지만 유엔군이 1951년 1·4후퇴를 진행하며 흥남항과 함흥항에서 배로 철수한 피난민이 다수를 점유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 계속 -
총 10만 건이 넘는 상봉 요청이 접수됐으며 절반에 가까운 내용만 방송됐음에도 1만 명 이상이 가족을 만났다. 6·25 전쟁 이후 생계를 유지하느라 가족을 잊고 살았던 한한 내의 이산가족은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있었다.
한국 내의 이산가족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북한에 거주하고 있는 이산가족은 분단된 지 80년이 된 현재도 해결될 기미가 전혀 없다. 북한 정부는 이산가족 문제를 한국과 정치적 협상 도구로 악용하고 있다.
현재 남북한 정부가 해결해야 하는 남북 이산가족은 1945년 한반도 분단, 1950~53년 6·25 전쟁, 남한 주민의 강제납치, 북한이탈주민 등으로 발생 원인이 다양하다. 개별 안건에 따라 해결방안이 다르지만 인도주의 차원에서 어느 하나도 방치할 수 없다는 점은 명확하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이북5도청 청사 전경 [출처=홈페이지]
◇ 남북이산 가족의 정의와 역사...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이탈주민 증가
가족은 ‘혈연, 혼인으로 관계돼 같이 일상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공동체(community)’라고 정의된다. 통상적으로 직계혈족과 배우자로 구성되며 인간사회의 기본이 되는 단위로 국가나 사회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통일 이전의 동독과 서독도 이산가족의 상봉을 위해 가족의 개념부터 정리했다. 1963년 ‘서베를린과 동독 간의 통행협정’에서 가족을 ‘부부, 부모, 자녀, 조손, 형제자매, 숙·백부모, 조카, 그들의 배우자’로 한정했다. 조손은 조부모와 손자, 숙·백부모는 숙부와 백부로 숙부는 아버지의 동생, 백부는 아버지의 형을 말한다.
중국과 대만은 쌍방의 이산가족이 고향을 방문하도록 허용하면서 가족을 별개로 규정했다. 중국은 부모, 배우자, 자녀로 한정한 반면 대만은 4촌 이내의 친척까지 확장했다.
중국은 1949년 대륙이 공산화되며 대만으로 이주한 본토인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대만은 중국과 달리 인도주의 차원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서독과 동독, 중국과 대만이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한국과 북한도 1980년대 들어 관련 이슈를 대화 의제로 삼기 시작했다. 1985년 8월 개최된 제9차 적십자 본회담에서 가족은 ‘헤어질 당시의 가족과 그 이후 출생 자녀’로 합의됐다.
하지만 친척의 범위에 대해서는 남한은 ‘방계 8촌, 처·외가 4촌’, 북한은 ‘남한의 범위 외에 당사자가 요구하는 친척’으로 넓히자고 주장했다. 북한은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북한 체제를 선전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해 접촉자의 숫자를 늘리길 희망했다.
남북한 이산가족이 누구인지 정의한 법률은 ‘남북이산가족 생사확인 및 교류촉진에 관한 법률이다. 동법 제2조에 따르면 남북이산가족은 ‘이산 사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현재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과 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으로 흩어져 있는 8촌 이내의 친척·인척 및 배우자 또는 배우지였던 자’로 정의돼 있다. 군사분계선 이남은 한국, 군사분계선 이북은 북한을 말한다.
이러한 개념에 비춰보면 이산가족은 전쟁으로 발생한 실향민, 전쟁 기간 중 강제 납북자 및 자진 월북자. 1953년 정전 협정 이후의 납북자 및 월북자, 북한이탈주민 등이 모두 포함된다.
납북자는 북한이 강제로 끌고 간 남한 주민을 말하며 월북자는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북한으로 올라간 사람이다. 납북자는 6·25 전쟁 기간 중에 주로 발생했지만 휴전 이후에도 어부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납치 사건이 적지 않았다.
북한이탈주민은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이후 북한 지역을 탈출해 남한으로 넘어온 주민을 말하며 일반인뿐만 아니라 공무원, 군인, 외교관 등을 모두 포함한다.
북한의 경제가 극도로 혼란해진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이탈주민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2020년 2월 코로나19로 국가간 이동이 제한되며 탈북자가 급감했다가 2023년 팬데믹(대유행)이 해제된 이후 점차 회복되고 있다.
학자들은 법률에 규정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로 해석한다. 이산가족을 ‘재결합으로 배우자, 형제자매의 혈족 및 인척으로서의 신분 관계를 회복·형성하고자 하는 사람’을 모두 포함한다.
▲ 625 전쟁 당시 피난민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해방 이후와 6·25 전쟁으로 생긴 이산가족... 고령화와 사망자 증가로 인도주의적 해법 필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진영과 소비에트연방공화국(소련)을 필두로 뭉친 사회주의 진영은 극한의 이념대결을 펼쳤다. 제국주의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국가는 강대국의 입맛에 따라 영토가 분할됐다.
1945년 2월 개최된 얄타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을 대일전에 참전시키기 위해 한반도를 분할 점령하자고 합의했다.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준비하며 1941년 4월 소련과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었다. 소련 입장에서는 독일과 전쟁에 전념해야 했으므로 동아시아 연해주에서 전쟁 자체를 원하지 않았다.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은 대일전에 참여하는 대가로 한반도 북부를 점령하길 원했다. 일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반도가 38도선을 경계로 남한과 북한으로 분리된 이유다.
북한은 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한 반면에 남한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38도선이 남북한을 분리하는 국경선으로 고착되며 이산가족이 된 사례로 적지 않았다. 북한에 거주하던 사람 중 일부는 소련과 미국은 3년의 신탁통치를 끝내고 철수할 예정이었으므로 분단 상황이 일시적이라고 믿었다. 통제가 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배격한 사회주의 체제를 피해 남쪽으로 잠시 피신한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6·25 전쟁은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과 강제 납북자로 수십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었다. 특히 해방 이후 5년 동안 북한의 강압적인 통치는 사회주의에 혐오감을 가진 주민을 양산했다.
븍한의 정치체제에 혐오감을 느낀 주민은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했다가 후퇴하는 행렬에 동참해 남쪽으로 대규모로 이동했다. 흥남항과 함흥함에서 미군 함정으로 탈출한 주민이 10만 명에 달했다.
남북 이산가족에 대한 공식적인 통계는 195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월남자는 총 73만5501명으로 전쟁 전 28만3313명, 전쟁 중 45만2188명으로 구성됐다.
1995년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센서스)에 따르면 이북 출생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40만3000명이었다. 2020년 조사에는 35만5000명으로 줄어들었다. 고령자의 사망 등으로 자연 감소가 진행 중으로 추정된다.
1970년 법원이 이북 지역에서 월남한 가족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호적 신고자는 546만3000명이다. 25년이 흐른 1995년 파악한 이산가족은 40만 명으로 급감했다. 많은 사람이 고령이나 질병 등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1970년 기준 남북 이산가족의 현황을 살펴보면 황해도 출신이 136만 명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 함경남도 120만 명, 평안남도 113만 명, 평안북도 84만 명, 함경북도 59만 명의 순이었다. 지역별 차이는 남한과의 거리 차이 때문으로 분석된다.
6·25 전쟁 당시에 한반도는 후진적인 농업국가로 자동차, 철도, 도로망 등 이동 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다. 대다수 피난민은 걷거나 우마차를 이용해 남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정확한 지도조차 없고 도로망이 열악해 이동 속도는 더디고 피난길은 고난의 여정이었다.
1952년과 1953년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연감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이나 전쟁 후에 납북된 사람은 8만 명을 넘는다. 1955년 대성호 피랍 사건 이후 납북된 사람은 총 3853명이며 2010년 말 기준 미 귀환자는 517명으로 집계됐다.
국군포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유엔(UN)군은 전쟁 당시 국군포로는 약 8만2000으로 추정했지만 북한이 인도한 국군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 1953년 체결된 정전협정에 따라 전쟁포로의 송환이 이뤄졌으나 북한에 억류된 국군포로는 송환 대상에서 제외됐다.
1977년 10월 국방부가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미귀환 국군포로는 1만9000여 명으로 추정된다. 한국전쟁 당시에 실종자는 4만1971명이지만 전사 처리자가 2만2562명, 생존 추정자는 351명이다.
남한 정부는 미귀환 국군포로의 송환에 적극적이지 않았고 북한 정부도 이들을 전후 복구사업에 투입하기 위해 소극적으로 대처했다.
1994년 국군포로 조창호 소위가 북한을 탈출해 귀국하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폭됐다. 2010년까지 총 80명의 국군포로가 탈북해 남한에 돌아왔다.
조창호 소위 이후에 귀국한 국군포로 중 누구도 정부의 도움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했다. 북한에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남한 가족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이들의 탈출을 도왔다.
2010년 기준 북한에 약 560명의 국군포로가 생존해 있다고 집계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이미 고령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당시에 20대라고 하더라도 이미 70년이 넘어 90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직후 ‘특수이산가족’ 또는 ‘광의의 이산가족’이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비전향장기수, 납북자, 미송환 국군포로, 월북자, 탈북자 등도 이산가족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논리다.
1세대 이산가족이 사망하면 가족을 찾으려는 2세가 많지 않게 된다. 이산가족은 남북한의 통일 이전에 자유롭게 왕래하고 서신을 교환하는 정도로도 만족한다. 하지만 북한은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고 있어 고령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산가족의 가슴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이산가족 신청 생존자 및 사망자 통계... 휴전선 인근 주민이 다수를 점유해
2009년 제정된 남북이산가족 생사 확인 및 교류 촉진에 관한 법률은 이산가족을 ‘이산의 사유와 경위를 불문하고 현재 군사분계선 이남 지역과 군사 분계선 이북 이역으로 흩어져 있는 8촌 이내의 친척·인척 및 배우자 또는 배우자이었던 자’로 규정했다.
2025년 1월 31일 기준 남북이산가족찾기 교류 현황에 따르면 전체 신청자는 13만4410명으로 조사됐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신청자는 전월 대비 119명 증가, 생존자는 전월 대비 136명 감소, 사망자는 전월 대비 255명 증가로 나타났다. 연령대별 생존자와 사망자는 다음과 같다.
1953년 6·25 전쟁이 끝난 후 73년이 지나면서 가족과 헤어진 사람은 최소 70대 이상으로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80세 이상의 비율이 전체의 67.8%로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도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져야 한다.
특히 80세 이상의 사망자가 전체의 74%를 넘을 정도로 높아 시간을 지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가족 관계별로 보면 부부·부모·자녀를 찾는 사람의 비율은 39.1%, 형제자매를 보고 싶어 하는 이산가족은 40.0%, 3촌 이상의 친척을 만나고자 하는 비율도 20.8%로 각각 집계됐다.
이산가족의 출신 지역을 구분하면 황해도 19.7%, 평안남도 10.3%, 평안북도 5.8%, 함경남도 9.0%, 함경북도 3.1%, 경기도 3.1%, 강원도 1.5%, 기타 47.5%로 나타났다.
남한과 북한이 분리된 38도선 인근 지역은 황해도, 평안남도의 비율이 30%로 많은 점도 특이하다. 6·25 전쟁이 오래 가지 않고 남북통일이 이뤄질 것이라는 믿고 38선 인근 지역의 국민이 남쪽으로 피난 온 것으로 추정된다.
함경남도와 함경북도는 남한과 긴 이동 거리 등으로 피난이 용이하지 않았지만 유엔군이 1951년 1·4후퇴를 진행하며 흥남항과 함흥항에서 배로 철수한 피난민이 다수를 점유했을 것으로 분석된다.
- 계속 -
저작권자 © 엠아이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