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17. 한민족의 이민 역사와 성장... 조선 말 만주·연해주 지역으로 이주 시작
하와이 농장으로 이민을 가며 글로벌 지역으로 확산... 1990년대 세계화로 다양한 목적의 이민 행렬 확대
5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민족(韓民族)은 단군 신화를 토대로 운명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다.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이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을 먹였는데 곰이 여인으로 환생해 낳은 아들이다.
1925년 육당 최남선은 한민족이 시베리아의 바아칼호(Lake Baikal)에서 살다가 남하해 한반도에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바이칼호 주변에 있는 브리야트(Buryaad) 자치공화국은 한국인과 유전자(DNA)가 거의 같다. 씨름, 춤, 설화, 서낭당 등과 같이 문화적으로 비슷한 측면이 많은 것도 이러한 학설을 뒷받침한다.
한민족은 고조선 이후 백두산 이남의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살았다. 중국 대륙에서 왕조의 교체 시기마다 침략받았지만 굳건하게 영토를 유지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동북부 지방을 통치했지만 점차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민족이 한반도를 벗어난 본격적인 이주는 조선 말기인 1869년 이후라고 봐야 한다. 한민족의 이민 역사를 알아보자.
▲ 러시아 브리야트공화국에 사는 샤먼이 바이칼호에서 찍은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조선 말 만주·연해주 지역으로 이주 시작... 하와이 농장으로 이민을 가며 글로벌 지역으로 확산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신흥사대부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국가 기강이 무너지며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다.
가난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넘쳐나자 1860년대 이후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이민자가 증가했다. 아시아 지역과 미주 지역이 대표적이다.
먼저 아시아를 보면 초기 이민자는 만주족의 청(靑)나라가 비워둔 만주 지역에 주로 정착했다. 만주족은 청을 건국해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긴 이후 발원지에 내국인조차 거주를 제한했다.
긴 겨울과 장기간 버려진 토지는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주민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농사를 지으며 만주에서 살던 조선인 중 일부는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갔다.
러시아 연해주는 제정 러시아 황실이 벌목과 모피 공급지로 개척했지만 적은 인구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초기에는 조선인의 이주를 막지 않았다. 자국민이 척박한 식민지로 이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자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며 이들 지역의 이민자가 급증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1920년대 독립군을 탄압하며 만주의 조선인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잘 견뎌냈다. 이들은 1945년 일제 압제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소수 민족으로 거주하며 조선족이라 불리고 있다.
반면 러시아 연해주에 정착했던 고려인은 1932년 일본이 만주로 침략하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은 연해주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이거나 협력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다수 고려인은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민족주의자라는 점도 한몫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유학, 취업 등의 목적으로 일본으로 향하는 조선인도 늘어났다. 일본이 제국주의 전쟁을 확장하면서 강제 징용자의 이주도 증가했다. 군수공장, 탄광, 군사기지 건설 등에 동원된 조선인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을 견뎌야 했다.
미주지역으로 이민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3년 이후 시작됐다. 1903년 102명의 조선인이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으로 건너갔다. 노예해방 이후 일손이 부족하던 플랜테이션(Plantation)은 중국인, 일본인, 인도인, 조선인을 일꾼으로 채용했다.
1903년부터 1905년 4월까지 7400명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1905년부터 1924년까지 약 2000명이 추가로 하와이 이민 대열에 동참했다. 조선에 와있던 미국인 선교사도 이주 노동자의 선발에 관여했다.
하와이는 이전에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자도 수입했지만 민족의 다양성을 유지하려고 조선인도 유치했다. 특정 민족만 일꾼으로 고용하면 통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905년 4월 1000여 명이 멕시코에 도착했다. 1921년 멕시코 한인 이민자 등 288명이 쿠바로 다시 이민 행렬을 만들었다. 쿠바가 멕시코보다 임금이나 근로조건 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쿠바의 노동조건도 노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해체되며 조선인의 해외 이주가 본격화됐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나 연해주로 월경(越境)하거나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등 미주 지역으로 이동하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전자는 봉건 체제의 수탈을 피한 디아스포라인 반면에 후자는 노동이동이라고 봐야 한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1960년대 이후 더 나은 삶을 찾아 미주 이민 증가... 1990년대 세계화로 다양한 목적의 이민 행렬 확대
1945년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지만 극심한 좌우 이념대결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1950년 분단된 남한고 북한이 충돌한 6·25 전쟁은 가난한 한국의 허약한 경제기반마저 무너뜨렸다.
1950~1953년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약 1만5000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1962년 남미 경제 대국인 브라질로 이민가는 한국인이 생겨났다. 1960년대 캐나다로 생계형 이민자도 증가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발전된 유럽으로 이민자가 선택한 국가는 독일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사망자가 약 700~800만 명으로 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에 동원된 남성 뿐 아니라 기아, 질병, 학살 등으로 민간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
독일은 패전 이후 복구 사업에 동원할 근로자가 부족하자 1955년부터 이탈리아, 그리스, 튀르키예 등에서 이민자를 받아 들였다. 초기에는 ‘손님 노동자(Gastarbeiter)’라는 의미의 노동력 파견협약을 맺었다.
급기야 독일 정부는 한국에까지 노동자 파견을 요청했다. 광부 8000여 명, 간호사 1만여 명, 조선 기술자 300여 명이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간호사는 1950년대부터 한국계 의사나 독일 종교인의 주선으로 독일의 병원에 취업했다. 광부는 1963년 한국 정부와 독일탄광협회의 협정에 따라 임시고용 형태로 파견됐다.
1970년대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자도 생겨났다. 1975년 남베트남의 멸망으로 현지에서 사업을 하던 근로자 중 일부가 한국 대신에 오스트레일리아를 목적지로 선택했다.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로 인종차별이 심했던 오스트레일리아는 광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부족해 숙련 노동자와 사업 이민자를 적극 수용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한 한인은 봉제업, 용접, 타일공 등 섬세한 손재주가 필요한 업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봉제업은 적은 인구로 산업 토대를 구축하기 어려웠던 오스트레일리아가 새로운 산업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용접이나 타일도 건설업의 발전에 필요한 업무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 물결을 타고 봉제업, 완구 및 일상 생활용품 등을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려는 사업 이민자가 늘어났다.
1987년 6·10 민주화 항쟁 이후 노조 활동이 활발해지고 민주화가 진전되며 인건비 상승, 열악한 근로조건 거부 등으로 이른바 3D(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 업종의 탈(脫)한국 물결이 거세졌다.
또한 한국인의 해외여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동남아시아 등지에 있는 주요 관광지에서 관광 안내, 식당, 숙박업소, 특산품점 등을 운영하기 위해 사업 이민자도 생겨났다.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케냐,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이들 이민자가 선택한 대표적인 목적지다. 관광객의 접급성이 높은 동남아시아가 수혜지로 부상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투자 이민을 가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한국 사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투자 이민 행렬에 뛰어들었다.
한인의 본격적인 이민역사는 120여 년에 불과할 정도로 짧지만 단기간에 다양한 트렌드가 나타났다. 경제적 유인부터 정치적 도피, 교육 기회의 확보 등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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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육당 최남선은 한민족이 시베리아의 바아칼호(Lake Baikal)에서 살다가 남하해 한반도에 정착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바이칼호 주변에 있는 브리야트(Buryaad) 자치공화국은 한국인과 유전자(DNA)가 거의 같다. 씨름, 춤, 설화, 서낭당 등과 같이 문화적으로 비슷한 측면이 많은 것도 이러한 학설을 뒷받침한다.
한민족은 고조선 이후 백두산 이남의 한반도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살았다. 중국 대륙에서 왕조의 교체 시기마다 침략받았지만 굳건하게 영토를 유지했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가 중국의 동북부 지방을 통치했지만 점차 남쪽으로 내려왔다. 한민족이 한반도를 벗어난 본격적인 이주는 조선 말기인 1869년 이후라고 봐야 한다. 한민족의 이민 역사를 알아보자.
▲ 러시아 브리야트공화국에 사는 샤먼이 바이칼호에서 찍은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 조선 말 만주·연해주 지역으로 이주 시작... 하와이 농장으로 이민을 가며 글로벌 지역으로 확산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개국한 신흥사대부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국가를 통치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국가 기강이 무너지며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다.
가난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 탐관오리(貪官汚吏)가 넘쳐나자 1860년대 이후 나라를 버리고 떠나는 이민자가 증가했다. 아시아 지역과 미주 지역이 대표적이다.
먼저 아시아를 보면 초기 이민자는 만주족의 청(靑)나라가 비워둔 만주 지역에 주로 정착했다. 만주족은 청을 건국해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긴 이후 발원지에 내국인조차 거주를 제한했다.
긴 겨울과 장기간 버려진 토지는 농사에 적합하지 않았지만 무상으로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주민에게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농사를 지으며 만주에서 살던 조선인 중 일부는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갔다.
러시아 연해주는 제정 러시아 황실이 벌목과 모피 공급지로 개척했지만 적은 인구로 활성화되지 못했다. 초기에는 조선인의 이주를 막지 않았다. 자국민이 척박한 식민지로 이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자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만주와 연해주로 이주하며 이들 지역의 이민자가 급증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1920년대 독립군을 탄압하며 만주의 조선인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잘 견뎌냈다. 이들은 1945년 일제 압제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소수 민족으로 거주하며 조선족이라 불리고 있다.
반면 러시아 연해주에 정착했던 고려인은 1932년 일본이 만주로 침략하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소련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Iosif Stalin)은 연해주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이거나 협력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다수 고려인은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민족주의자라는 점도 한몫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유학, 취업 등의 목적으로 일본으로 향하는 조선인도 늘어났다. 일본이 제국주의 전쟁을 확장하면서 강제 징용자의 이주도 증가했다. 군수공장, 탄광, 군사기지 건설 등에 동원된 조선인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낮은 임금을 견뎌야 했다.
미주지역으로 이민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3년 이후 시작됐다. 1903년 102명의 조선인이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의 일꾼으로 건너갔다. 노예해방 이후 일손이 부족하던 플랜테이션(Plantation)은 중국인, 일본인, 인도인, 조선인을 일꾼으로 채용했다.
1903년부터 1905년 4월까지 7400명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1905년부터 1924년까지 약 2000명이 추가로 하와이 이민 대열에 동참했다. 조선에 와있던 미국인 선교사도 이주 노동자의 선발에 관여했다.
하와이는 이전에 중국과 일본에서 노동자도 수입했지만 민족의 다양성을 유지하려고 조선인도 유치했다. 특정 민족만 일꾼으로 고용하면 통제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1905년 4월 1000여 명이 멕시코에 도착했다. 1921년 멕시코 한인 이민자 등 288명이 쿠바로 다시 이민 행렬을 만들었다. 쿠바가 멕시코보다 임금이나 근로조건 등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쿠바의 노동조건도 노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해체되며 조선인의 해외 이주가 본격화됐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만주나 연해주로 월경(越境)하거나 태평양을 건너 하와이 등 미주 지역으로 이동하는 형식으로 나타났다. 전자는 봉건 체제의 수탈을 피한 디아스포라인 반면에 후자는 노동이동이라고 봐야 한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1960년대 이후 더 나은 삶을 찾아 미주 이민 증가... 1990년대 세계화로 다양한 목적의 이민 행렬 확대
1945년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지만 극심한 좌우 이념대결로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1950년 분단된 남한고 북한이 충돌한 6·25 전쟁은 가난한 한국의 허약한 경제기반마저 무너뜨렸다.
1950~1953년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약 1만5000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1962년 남미 경제 대국인 브라질로 이민가는 한국인이 생겨났다. 1960년대 캐나다로 생계형 이민자도 증가했다.
당시 경제적으로 발전된 유럽으로 이민자가 선택한 국가는 독일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사망자가 약 700~800만 명으로 달할 정도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전쟁에 동원된 남성 뿐 아니라 기아, 질병, 학살 등으로 민간인 피해도 적지 않았다.
독일은 패전 이후 복구 사업에 동원할 근로자가 부족하자 1955년부터 이탈리아, 그리스, 튀르키예 등에서 이민자를 받아 들였다. 초기에는 ‘손님 노동자(Gastarbeiter)’라는 의미의 노동력 파견협약을 맺었다.
급기야 독일 정부는 한국에까지 노동자 파견을 요청했다. 광부 8000여 명, 간호사 1만여 명, 조선 기술자 300여 명이 돈을 벌기 위해 독일로 떠났다.
간호사는 1950년대부터 한국계 의사나 독일 종교인의 주선으로 독일의 병원에 취업했다. 광부는 1963년 한국 정부와 독일탄광협회의 협정에 따라 임시고용 형태로 파견됐다.
1970년대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자도 생겨났다. 1975년 남베트남의 멸망으로 현지에서 사업을 하던 근로자 중 일부가 한국 대신에 오스트레일리아를 목적지로 선택했다.
백호주의(White Australia policy)로 인종차별이 심했던 오스트레일리아는 광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가 부족해 숙련 노동자와 사업 이민자를 적극 수용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 정착한 한인은 봉제업, 용접, 타일공 등 섬세한 손재주가 필요한 업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봉제업은 적은 인구로 산업 토대를 구축하기 어려웠던 오스트레일리아가 새로운 산업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도록 도왔다. 용접이나 타일도 건설업의 발전에 필요한 업무다.
1990년대 이후 세계화 물결을 타고 봉제업, 완구 및 일상 생활용품 등을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려는 사업 이민자가 늘어났다.
1987년 6·10 민주화 항쟁 이후 노조 활동이 활발해지고 민주화가 진전되며 인건비 상승, 열악한 근로조건 거부 등으로 이른바 3D(더럽고, 힘들고 어려운 일) 업종의 탈(脫)한국 물결이 거세졌다.
또한 한국인의 해외여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동남아시아 등지에 있는 주요 관광지에서 관광 안내, 식당, 숙박업소, 특산품점 등을 운영하기 위해 사업 이민자도 생겨났다.
베트남,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케냐, 나이지리아,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이들 이민자가 선택한 대표적인 목적지다. 관광객의 접급성이 높은 동남아시아가 수혜지로 부상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투자 이민을 가는 사람도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한국 사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투자 이민 행렬에 뛰어들었다.
한인의 본격적인 이민역사는 120여 년에 불과할 정도로 짧지만 단기간에 다양한 트렌드가 나타났다. 경제적 유인부터 정치적 도피, 교육 기회의 확보 등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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