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11. 중국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성장... 일본 요코하마에서 화교가 탄생하며 보통명사로 자리매김
당나라 이후 해외로 이주하는 중국인 증가해... 대항해 시대에 중개상 역할을 수행하며 동남아시아로 대거 이주
민진규 대기자
2026-07-06 오후 2:39:12
1만 년의 유구한 역사와 광대한 영토, 많은 인구와 다수 국가와 접한 중국은 해외 진출에 적극적이었다. 고대 중국의 비단은 직조 기술이 발전하지 못한 로마제국에서 탐낼 정도로 비싼 교역물자였다.

비단뿐만 아니라 도자기, 종이, 화약 등도 주변국이 적극 수입하고자 하는 전략물자였다. 중국 역대 왕조는 조공(朝貢)을 통해 공식적인 교류를 허용했지만 이것으로 외국의 막대한 수요를 충족하지 못했다.

무역은 정보격차(intelligence gap)를 활용해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육상과 해상을 통한 물자이동에 뛰어드는 사람이 많았다.

왕조의 교체와 지배층의 변화로 해외로 피난가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중국인 디아스포라가 확산된 이유다.


▲ 일본 요코하마시에 위치한 차이나타운 전경 [출처=시청 홈페이지]


◇ 화교의 개념과 모국의 보호정책... 일본 요코하마에서 화교가 탄생하며 보통명사로 자리매김

화교(華僑)라는 명칭은 1898년 일본 요코하마에 거주하던 중국 상인들이 학교를 세우면서 ’화교학교‘라고 명명하며 시작됐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제국의 위엄이 사라진 청(靑)은 1909년 국적법으로 ’외국 영토에 거주하면서 중국 국적을 상실하지 않은 모든 중국인을 화교(overseas chinese)‘고 칭했다.

한자어로 화(華)는 ’중국인‘, 교(僑)는 ’임시로 거주하는 것‘을 각각 의미한다. 화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화교가 근대 민족주의 산물로 외세에 의해 나약해진 중국이 호전적인 서구열강에 맞서기 위해 애국심을 부흥시키고자 창안한 용어라고 주장한다.

1911년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중화민국(中華民國)을 건국하게 만든 신하이혁명(辛亥革命) 이후 모든 해외 거주 중국인에게 보편적으로 사용했다. 1929년 중화민국 헌법에도 이러한 내용이 포함됐다.

청과 중화민국이 혈통주의 원칙에 따라 ’중국인 아버지를 둔 중국인은 외국에서 살다가 귀국하면 중국인으로 간주된다‘고 공표했다. 해외 중국인에게 귀속 의식을 심어주고 해외 거주국에서도 정치적 보호를 받도록 지원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1949년 중국 본토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은 1950년대 대약진운동, 1960년대 문화대혁명을 거친 후 1978년 개혁개방 정책을 도입했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흐름과 제조업 중심이 아시아로 이동하며 중국은 세계의 공장으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오바마(Obama) 행정부는 2001년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을 지원하며 상호협력의 시대를 열었다. 중국은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생산한 상품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장악했다.

전 세계에 구축된 중국인 디아스포라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도시에 있는 차이나타운은 중국인 디아스포라의 심장부다. 이들은 특유의 연대 의식과 상부상조로 사업적 기반을 구축했다.

차이나타운은 단순히 관광지가 아니라 중국인의 주거와 경제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집단 거주를 통해 일체감을 키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폭동이나 위협으로부터 안전도 확보 가능하기 때문이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고대부터 근대까지 해외 화교의 형성 역사... 당나라 이후 해외로 이주하는 중국인 증가해

중국은 고대부터 광대한 영토와 풍부한 물산으로 경제적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해외로 이주할 필요성은 낮았다. 오히려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등을 수입하려는 외국인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국가였다.

중국에서 생산된 비단은 서역 상인들에 의해 텐산(天山)과 파미르고원 (Pamir Mountains)을 넘어 중동과 유럽까지 수출됐다. 로마에 도착한 비단은 당시 금의 무게와 같은 금액으로 판매됐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 최초의 국가인 진(秦)나라를 건국한 이후 북쪽의 기마민족은 끊임없이 침략을 감행했다. 거란족, 돌궐족, 몽고족, 만주족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이 중국을 점령해도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낮아 토착민인 한족(汉族)을 수용해야 했다. 한족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대규모 해외 이주를 선택할 필요성은 낮았던 이유다.

하지만 당(唐)나라가 멸망 이후 5대 10국의 혼란을 잠재우고 건국된 송(宋)은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 여진족이 건국한 금(金)나라의 공격을 견뎌냈지만 몽고족의 침입으로 멸망했다.

송은 수도를 남쪽 항구도시인 항저우(杭州)로 이전한 후 남송(南宋) 이대를 열었다. 좁아진 국토와 경제적 위축을 극복하고자 농업 대신에 상업을 발전시키고 해군력을 바탕으로 동남아시아와 지역과 해상교역을 강화했다.

송은 11세기부터 동남아시아 지역인 남양(南洋)과 무역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북쪽의 많은 영토를 잃어 재정이 부족해 무역을 통한 이익에 세금을 거둬 국가재정을 뒷받침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송을 멸망시킨 원(元)도 무역을 진흥하기 위해 노력했다. 무역으로 엄청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파악한 것도 원이 교역에 적극적인 이유다. 13세기 이후 동남아시아와 무역이 번성하며 이들 지역으로 진출하는 중국 상인의 수도 증가했다.

일부 중국인은 원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동남아시아로 피난을 가는 행렬이 이어졌다. 남송이 수도였던 임안(臨安)은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고 국제 무역에 능숙한 상인이 많이 거주했다.

14세기 몽고족이 세운 원을 멸망시킨 명(明)은 조공 무역을 제외한 일체의 사무역을 금지하는 해금(海禁) 정책을 펼쳤다. 명의 정책으로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하던 중국 상인은 본토로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정착했다.

명의 3대 황제인 영락제(永樂帝)는 환관인 정허(鄭和)에게 대원정을 명령했다. 정허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대규모 함대를 편성해 동남아시아, 인도양을 거쳐 동아프리카 해안까지 진출했지만 정식 무역보다는 조공 무역에 관심을 가졌다.

1405년 1차 항해에 동원된 함선은 240여 척, 인원은 2만7800여 명에 달했다. 함대는 동남아시아를 거쳐 페르시아만과 아프리카 대륙까지 진출했다.

명은 정허의 대원정 이후 관료들의 반대로 해상 무역에 대한 관심을 끊었다. 교역으로 부를 축적하던 귀족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본국과 왕래가 끊기면서 동남아시아에 거주하던 중국인은 점차 현지 사회에 동화됐다.

◇ 대항해 시대에 중개상 역할을 수행하며 동남아시아로 대거 이주... 아편전쟁 이후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며 유럽인은 대항해의 시대를 열었다. 17세기 유럽 상인은 동남아시아에 진출했으며 고대부터 거래하던 중국인이 중개상의 역할을 담당하길 희망했다. 현지 사정에 밝은 중국인이 현지에서 상품을 조달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1567년 명 정부는 해금정책을 폐지했다. 상인의 사무역이 합법화되며 동남아시아로 해외 진출은 더욱 늘어났다. 17세기 한족 중심의 명이 만주족의 청(靑)에 멸망하며 연안 지역에 거주하던 상인과 귀족의 동남아시아 이주는 급증했다.

명에서 귀족으로 권력을 누리던 일부 세력은 현재의 대만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초기에는 명을 복원하겠다는 의지가 강했지만 청을 격퇴시킬 만큼 충분한 세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은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는 데 관심을 가졌다.

15세기 이후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이 경쟁적으로 중국에 진출하며 교역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중국의 비단, 차, 도자기가 서양에서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청과 무역에 필요한 은(silvr)은 신대륙에서 조달했지만 한계에 부딪혔다.

영국은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opium)을 중국에 유입시켜 무역수지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영국 상인이 반입해 유통한 마약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상하자 청은 이를 적극 단속했다.

1840년 영국은 청을 상대로 1차 아편전쟁을 일으켰으며 청은 자국민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다. 1842년 체결된 난징조약(南京條約)은 중국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시켰으며 법적으로 중국인의 해외 이주도 가능해졌다.

1848년부터 1865년까지 이어진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은 남중국의 경제기반을 붕괴시켰고 사회적 혼란이 가중됐다. 명나라의 초기 수도였던 난징(南京)을 함락한 후 세력을 확장했지만 정상적인 국가로 자리매김하지는 못했다.

19세기 중엽 이후 남중국에 거주하던 중국인의 해외 이주는 동남아시아 뿐 아니라 미국, 멕시코 등으로 다양해졌다. 특히 미국은 노예해방으로 흑인 노동자가 부족한 상황에서 서부 개척으로 철도부설, 교량 건설, 도로 확장 등 대규모 토목공사에 필요한 노동자를 조달해야 했다.

아시아에서 이주한 노동자 일부는 흑인을 대체해 사탕수수, 담배 등 대규모 농장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자발적인 노동 이민이었지만 중간에 상인이 개입하며 노예와 비슷한 처지로 내몰린 사람이 많았다.
- 계속 -
저작권자 © 엠아이앤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 기사
기획·특집 분류 내의 이전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