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정보기관 활동] 13. 일본의 우경화와 국가정보전략... 막강한 경제력·외교력 기반으로 군사 재무장 추진
일본 뿐 아니라 중국·한국에도 우익은 존재해... 대다수 일본 국민은 군국주의 부활에 동의하지 않아
일본 역사상 최초의 여성 총리에 오른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의 인기가 고공행진하고 있다. 보수적인 정치인과 달리 솔직화법으로 대중과 소통하고 있기 떼문이다.
다카이치 총리는 2025년 12월1일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금융회의 '퓨처 인베스트먼트 이니셔티브(FII)'에서 '됐으니까 닥치고 전부 나한테 투자해!(Just shut your mouth. And invest everything me)'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 문구는 인기 만화인 '진격의 거인(進撃の 巨人)'에 나오며 행사의 주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본 만화의 인기가가 높다. FII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인 PIF 산하 FII 인스티튜드가 주최한 행사다.
◇ 일본 뿐 아니라 중국·한국에도 우익은 존재해... 대다수 일본 국민은 군국주의 부활에 동의하지 않아
동북아의 섬나라인 일본은 고대부터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토양, 태풍·지진 등과 같은 끊이지 않는 천재지변 등으로 대륙과 교류를 희망했다.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신라가 융성했을 당시에는 이들 국가를 통해 유교, 한자, 의술, 문화 등을 받아들였다.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지면 정상적인 교역보다 노략질을 통해 조달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최대 교역국이던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통일신라와 고려와 적극 교역하기보다는 중국 대룍으로 가는 해로를 개척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조신 시대에 접어들어 정상적인 외교 채널을 복원했지만 전국시대 혼란을 정돈한 이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조선에서 도공을 납치하고 은 제련술을 배워 서양 상인과 교역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메이지유신으로 개혁파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아시아의 소국에서 벗어나 강대국이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른바 탈아론((脫亞論)으로 서구문명을 도입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진해 성공했다.
강화된 국력을 바탕으로 조선부터 침략해 만주, 중국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다 결국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며 무너졌다. 패전 이후에도 적절한 반성보다는 과거의 영화를 재건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일본에서 우익이 발호해 천황제를 고수하고 주변국과 끊임 없이 갈등을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과 중국에도 우익은 존재한다.
주변국가가 일본의 우익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군국주의가 부활해 침략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2025년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대다수 국민은 군국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MZ(밀레니얼 +Z) 세대는 국가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60세가 넘은 노인층도 침략전쟁보다 개인의 안정적인 노후를 걱정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반성, 독도 분쟁 등으로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국력 측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는 일본을 경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일본 우익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하며 거리를 두기보다 평범한 국민과 적극 협력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더구나 21세기 초입부터 관계설정을 제대로 해야 남은 100년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 국가정보기관의 이해 - 활동영역과 개혁과제 표지 by 민진규 [출처=엠아이앤뉴스]
◇ 2006년 9월 4일 작성한 칼럼 소개... 막강한 경제력·외교력 기반으로 군사 재무장 추진
최근 일본의 우경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일본 자위대의 무장 강화와 자의적인 기준에 의한 해외 파견, 안보리 진출 시도, 독도 침탈 시도, 중국과 난사 군도(南沙群島) 분쟁, 러시아와 사할린(Sakhalin) 분쟁 등 일본의 거침없는 행보가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전과 너무 비슷하다.
일본의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위한 침략과 수탈 뒤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막강한 정보력이 바탕이 됐다는 것을 아는 일반인은 별로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설 자리가 없던 무사(武士), 즉 사무라이들을 훈련시켜 낭인이라는 이름으로 조선과 중국 대륙, 동남아 등지로 보냈다.
조선 침탈도 일순간의 군사적 침략과 국내 친일파들의 협조로 완성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부터 조선에 대한 정보활동을 개시했다.
일본 군부는 1882년 일본에 온 수신사 김옥균 일행을 통해서 조선의 정세를 파악했으며 1884년 김옥균 등을 앞세워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일본의 지원만을 믿고 급진적으로 일으킨 정변은 실패했지만 일본의 군부는 호시탐탐(虎視眈眈)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겠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진주했다. 동학혁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스파이를 활용해 조선의 국정을 농락하던 청(淸)에 대한 정보를 적극 수집했다.
사실 청나라는 자체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고 서양 제국주의자들에게 유린당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일본은 청국의 내정이 복잡하고 군대가 낙후돼 조선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한반도에 파견된 청군을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후 김홍집을 위시한 친일 정권이 수립됐고 단계적인 조선 강제 병합 절차를 진행한 것이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러시아 세력의 도전장을 받게 되자 제정 러시아 공산주의자에 대한 지원을 단행하여 힘을 약화시킨 후 러일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러일 전쟁 승리로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확고하게 다지고 영국 등 열강들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조선을 침탈한 것이다.
일본은 30년 이상 조선에 관한 엄청난 정보를 수집해 활용했다. 만주나 중국, 동남아시아 등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전개할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제국주의를 앞세웠던 일본의 우익과 군부가 다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 다음으로 강력하며 미국도 탐낼 정도로 발전된 최첨단 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 총리가 주변국의 우려와 경고에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를 참배하고 우익집단은 연일 영토 문제 등에 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동안 내각조사실에서 해오던 해외정보 수집을 별도의 정보기관을 설립해 체계적이고 강력하게 진행하려 시도하고 있다.
즉 우익 인사들은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같은 국가 차원에서 정보전략을 수립 및 실행할 핵심 정보기관을 설립하고 인원도 대폭 늘려서 막강한 정보력을 갖추겠다는 심산이다.
일본은 경제력과 상당한 해외원조에도 외교 교섭력이 약하고 다른 국가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정보력이 부족해서라고 판단하고 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과거 일본은 민간회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조사부를 설치해 정보를 취합하고 정부에 제공하는 방식을 취했다. 국가정보기관은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만철이라고 불리던 민간회사도 국가기관처럼 행동했다.
일본의 정계와 경제계가 보수 우익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일본의 정보력 강화는 대외 강경정책과 우경화 체계를 굳건하게 만들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직 일본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 우경화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모르겠다. 최근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시험발사로 군사 대국화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잠재우고 자위대를 첨단 무기로 재무장시키고 있는 것만은 명확하다.
국가정보기관 하나를 설립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파급 효과가 있을 것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일본 군부와 우익집단의 행태를 알고 있는 전문가들은 당연히 우려한다.
현대에서 최첨단 무기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아무리 군인의 정신력이 강하고 훈련이 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첨단 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수행된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등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일본의 막강한 경제력이 군사 무장과 대외 팽창에 활용된다면 동북아 국가끼리 걷잡을 수 없는 충돌로까지 발전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한국의 정치인들이 아는지 모르겠다.
- 계속 -
다카이치 총리는 2025년 12월1일 도쿄에서 개최된 국제금융회의 '퓨처 인베스트먼트 이니셔티브(FII)'에서 '됐으니까 닥치고 전부 나한테 투자해!(Just shut your mouth. And invest everything me)'라는 말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이 문구는 인기 만화인 '진격의 거인(進撃の 巨人)'에 나오며 행사의 주최국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일본 만화의 인기가가 높다. FII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인 PIF 산하 FII 인스티튜드가 주최한 행사다.
◇ 일본 뿐 아니라 중국·한국에도 우익은 존재해... 대다수 일본 국민은 군국주의 부활에 동의하지 않아
동북아의 섬나라인 일본은 고대부터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척박한 토양, 태풍·지진 등과 같은 끊이지 않는 천재지변 등으로 대륙과 교류를 희망했다.
한반도 남부에서 백제와 신라가 융성했을 당시에는 이들 국가를 통해 유교, 한자, 의술, 문화 등을 받아들였다.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지면 정상적인 교역보다 노략질을 통해 조달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최대 교역국이던 백제가 멸망한 이후에는 통일신라와 고려와 적극 교역하기보다는 중국 대룍으로 가는 해로를 개척하는데 역량을 집중했다.
조신 시대에 접어들어 정상적인 외교 채널을 복원했지만 전국시대 혼란을 정돈한 이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조선에서 도공을 납치하고 은 제련술을 배워 서양 상인과 교역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했다.
메이지유신으로 개혁파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아시아의 소국에서 벗어나 강대국이 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이른바 탈아론((脫亞論)으로 서구문명을 도입해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진해 성공했다.
강화된 국력을 바탕으로 조선부터 침략해 만주, 중국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다 결국 태평양전쟁에서 패전하며 무너졌다. 패전 이후에도 적절한 반성보다는 과거의 영화를 재건하겠다는 야욕을 버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와 중국은 일본에서 우익이 발호해 천황제를 고수하고 주변국과 끊임 없이 갈등을 초래한다고 비판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과 중국에도 우익은 존재한다.
주변국가가 일본의 우익에 대해 우려하는 것은 군국주의가 부활해 침략전쟁을 벌일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2025년 현재 일본에 살고 있는 대다수 국민은 군국주의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MZ(밀레니얼 +Z) 세대는 국가보다는 개인의 가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60세가 넘은 노인층도 침략전쟁보다 개인의 안정적인 노후를 걱정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대한 반성, 독도 분쟁 등으로 관계가 원만하지 못할 뿐 아니라 국력 측면에서도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는 일본을 경계하는 편이다.
그럼에도 일본 우익에 대해 지나치게 경계하며 거리를 두기보다 평범한 국민과 적극 협력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된다. 더구나 21세기 초입부터 관계설정을 제대로 해야 남은 100년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 국가정보기관의 이해 - 활동영역과 개혁과제 표지 by 민진규 [출처=엠아이앤뉴스]
◇ 2006년 9월 4일 작성한 칼럼 소개... 막강한 경제력·외교력 기반으로 군사 재무장 추진
최근 일본의 우경화 바람이 심상치 않다. 일본 자위대의 무장 강화와 자의적인 기준에 의한 해외 파견, 안보리 진출 시도, 독도 침탈 시도, 중국과 난사 군도(南沙群島) 분쟁, 러시아와 사할린(Sakhalin) 분쟁 등 일본의 거침없는 행보가 제 2차 세계대전 발발 전과 너무 비슷하다.
일본의 소위 말하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위한 침략과 수탈 뒤에는 일본 정보기관의 막강한 정보력이 바탕이 됐다는 것을 아는 일반인은 별로 없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설 자리가 없던 무사(武士), 즉 사무라이들을 훈련시켜 낭인이라는 이름으로 조선과 중국 대륙, 동남아 등지로 보냈다.
조선 침탈도 일순간의 군사적 침략과 국내 친일파들의 협조로 완성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다르다. 일본은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은 이후부터 조선에 대한 정보활동을 개시했다.
일본 군부는 1882년 일본에 온 수신사 김옥균 일행을 통해서 조선의 정세를 파악했으며 1884년 김옥균 등을 앞세워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일본의 지원만을 믿고 급진적으로 일으킨 정변은 실패했지만 일본의 군부는 호시탐탐(虎視眈眈)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자 동학 농민군을 진압하겠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진주했다. 동학혁명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스파이를 활용해 조선의 국정을 농락하던 청(淸)에 대한 정보를 적극 수집했다.
사실 청나라는 자체 국내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고 서양 제국주의자들에게 유린당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일본은 청국의 내정이 복잡하고 군대가 낙후돼 조선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한반도에 파견된 청군을 대상으로 전쟁을 일으켜 승리한 후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이후 김홍집을 위시한 친일 정권이 수립됐고 단계적인 조선 강제 병합 절차를 진행한 것이다.
고종의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러시아 세력의 도전장을 받게 되자 제정 러시아 공산주의자에 대한 지원을 단행하여 힘을 약화시킨 후 러일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러일 전쟁 승리로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확고하게 다지고 영국 등 열강들과 협력을 강화하면서 조선을 침탈한 것이다.
일본은 30년 이상 조선에 관한 엄청난 정보를 수집해 활용했다. 만주나 중국, 동남아시아 등으로 제국주의 침략을 전개할 때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고 보면 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제국주의를 앞세웠던 일본의 우익과 군부가 다시 은밀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일본의 경제력은 미국 다음으로 강력하며 미국도 탐낼 정도로 발전된 최첨단 기술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최근에 총리가 주변국의 우려와 경고에도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를 참배하고 우익집단은 연일 영토 문제 등에 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동안 내각조사실에서 해오던 해외정보 수집을 별도의 정보기관을 설립해 체계적이고 강력하게 진행하려 시도하고 있다.
즉 우익 인사들은 미국의 중앙정보국(CIA)과 같은 국가 차원에서 정보전략을 수립 및 실행할 핵심 정보기관을 설립하고 인원도 대폭 늘려서 막강한 정보력을 갖추겠다는 심산이다.
일본은 경제력과 상당한 해외원조에도 외교 교섭력이 약하고 다른 국가로부터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정보력이 부족해서라고 판단하고 있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과거 일본은 민간회사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에 조사부를 설치해 정보를 취합하고 정부에 제공하는 방식을 취했다. 국가정보기관은 국가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활동한다. 만철이라고 불리던 민간회사도 국가기관처럼 행동했다.
일본의 정계와 경제계가 보수 우익으로 채워진 상태에서 일본의 정보력 강화는 대외 강경정책과 우경화 체계를 굳건하게 만들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직 일본의 군국주의와 팽창주의 우경화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모르겠다. 최근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시험발사로 군사 대국화에 대한 여론의 반발을 잠재우고 자위대를 첨단 무기로 재무장시키고 있는 것만은 명확하다.
국가정보기관 하나를 설립하는 것이 이렇게까지 파급 효과가 있을 것인가라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일본 군부와 우익집단의 행태를 알고 있는 전문가들은 당연히 우려한다.
현대에서 최첨단 무기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소요된다. 아무리 군인의 정신력이 강하고 훈련이 잘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첨단 무기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최근에 수행된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 등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일본의 막강한 경제력이 군사 무장과 대외 팽창에 활용된다면 동북아 국가끼리 걷잡을 수 없는 충돌로까지 발전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한국의 정치인들이 아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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