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디아스포라] 15. 인도인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성장... 가난과 신분제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 이주 증가
독립 이전 식민지 시대에는 반강제적 계약 노동자로 이주... 영국의 외국 식민지로 분산되며 거대한 네트워크 형성
민진규 대기자
2026-07-15 오후 8:13:46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인 인도는 다양한 민족, 언어, 종교 등이 융·복합적으로 형성된 국가다. 산아제한 정책을 시행한 중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인구 대국으로 발돋움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중국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인도는 교육 수준이 높고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많아 해외 진출이 용이한 편이다. 특히 영국 식민 통치의 유산인 영어가 최대 강점으로 작용했다. 중국 화교와 달리 언어 장벽이 없어 미국, 캐나다, 유럽 등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2010년 이후 인도인 디아스포라는 중국인을 넘어 세계 최대 규모에 등극했다. 2014년 나렌드라 모디(Narendra Damodardas Modi)가 총리로 등극하며 가난한 농업국가에서 제조국가로 변신하는 인도 정부에 강력한 자원이다.

인도인 디아스포라는 양적인 부문에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신분제 갈등, 종교적 갈등, 이질적인 문화 등은 거주국과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영국 식민지 당시의 인도 지도 [출처=위키피디아]


◇ 고대부터 근세 이전의 해외 진출 역사... 아리안게 상인인 파르시가 구자라트 지역에 정착

고대부터 인도인은 중앙아시아와 중동 지역으로 진출했다. 상업활동의 거점을 넓히기 위한 목적이었다. 인도 북서부 해안에 위치한 구자라트(Gujarat) 지역은 동부 아프리카 해안을 중심으로 활발한 상업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인도 파르시(Parsi)는 8~10세기 이란에서 인도 북서부 구자라트주로 이주해 정착한 아리안계 상인집단이다. 세계 최초의 일신교로 불리는 조로아스터쿄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이민을 선택했다. 이들은 종교는 유지하지만 언어, 복식 등은 현지화했다.

16세기 이후에는 인도로 진출한 유럽인에 선원이나 노동자로 고용돼 해외로 나갔다. 영국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는 17세기부터 인도인을 미국에 노예로 팔았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Abraham Lincoln)이 1863년 노예를 해방시키면서 인도인도 신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국 식민지 당시에는 서부 구자라트(Gujarat)와 신드(Sind) 지방의 상인이 중동의 아라비아반도, 오만, 바레인, 아랍에미리트, 동아프리카, 남아프리카 등으로 진출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는 해외 계약노동자의 공급지로 부상했다. 인도 근로자가 필요한 곳은 남태평양의 피지, 인도네시아, 케냐, 우간다, 탄자니아, 마다가스카르, 남아프리카공화국, 가이아나, 자메이카 등으로 다양했다. 가이아나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북부, 자메이카는 카리브해에 있는 국가다.

아프리카와 중남미 지역으로 이주했던 인도인은 다시 영국으로 이주하는 행렬에 동참한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1947년 이전 및 이후 본토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사람도 많았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이후 신분제가 없으며 자녀 교육에 유리한 미국, 캐나다로 이주했다. 인도인의 교육열은 매우 높아 의사, 변호사, 대학교수 등의 전문직에 대한 진출이 많아졌다.


▲ 한인 디아스포라-역사와 미래 표지 by 민진규 교수 [출처=엠아이앤뉴스]


◇ 독립 이전 식민지 시대에는 계약 노동자로 이주... 가난과 신분제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자발적 이주 증가

식민지 시대에 인도는 케냐 등 동부 아프리카에 계약 노동자로 건너갔다. 이후에는 아프리카 서부로도 진출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100만 명이 넘는 인도인이 영국 식민지 내 건설된 플랜테이션(plantation)에서 일하려고 이주했다.

피지, 모리셔스, 자메이카, 가이아나, 수리남,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대표적이다. 플랜테이션은 사탕수수, 바나나, 파인애플 등 이른바 환금작물(cash corp)을 전문으로 재배하는 대규모 상업적 농업농장을 말한다.

많은 영국인이 19세기 캐러비안 사탕수수 사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는데 노예가 해방되며 노동자를 찾지 못했다. 인도인이 흑인 대신에 투입된 것이다.

남부 아프리카에도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기 위해 인도인 노동자를 수입했다. 이들은 타밀, 비하르, 우타르 프라데시 등 다양한 지역에서 출발해 지역과 언어, 종교가 달랐다. 인도인이라는 정체성보다 출신 지역, 언어, 종교 등을 기반으로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 이유다.

영국이 인도인을 해외 식민지로 보내겠다고 결심한 것은 1838년 미국이 노예제를 폐지했기 때문이다. 프랑스와 덴마크는 1848년, 네덜란드는 이들 국가보다 늦은 1863년이 되어서야 노예 제도를 없앴다. 


 영국 식민지 시절 해외로 이주한 인도 계약 노동자 (단위 : 명)


 


국가


기간


계약 노동자


1


영국령 가이아나


1838~1917


238,900


2


네덜란드령 가이아나


1873~1916


34,300


3


피지


1879~1895


61,000


4


프랑스령 가이아나


1856~1895


4,400


5


그레나다


1857~1885


3,200


6


과들루프


1854~1885


42,300


7


자메이카


1854~1889


36,400


8


마르티니크


1854~1871


25,500


9


모리셔스


1834~1871


5,000,000 이상


10


나탈


1860~1911


152,200


11


세인트 크로이


1862


300


12


세인트 키츠


1860~1865


300


13


세인트 빈센트


1860~1880


2,500


14


트리니다드


1845~1917


143,000


흑인 노예를 대체할 저렴한 노동자를 찾은 곳이 인도였다. 영국은 1838년 영국령 가이아나에 인도 노동자를 강제로 이주시켰다. 이들은 쿨리(coolie)로 불리는 저임은 노동자로 노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부는 모집인이 선불을 받았기 때문에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카리브해에 있는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최초의 인도인 노동자의 정착지였다. 가이아나는 영국 뿐 아니라 네덜란드, 프랑스가 분할 통치하고 있었지만 모두 인도인 노동자를 데려왔다.

인도인 노동자가 가장 많이 송출된 지역은 모리셔스다. 약 500만 명 이상이 보내졌다. 모리셔스는 아프리카 동부, 인도양 남서부에 있는 섬으로 마다가스카르에서 동쪽으로 약 900킬로미터(km) 떨어져 있다.

피지는 남태평양에 있는 섬이지만 그레나다, 과들루프, 자메이카, 마르티니크, 세인트 크로이, 세인트 키츠, 세인트 빈센트, 트리니다드 등은 모두 카리브해에 위치해 있다.

인도인은 근면 성실하고 다양한 유형의 농사에 경험이 풍부해 노동자로서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수 인도인은 가난한 생활환경과 신분제를 벗어날 좋은 기회라고 판단해 이주 대열에 동참했다.

다른 이민 행렬은 종교가 유발했다. 인도 북부 펀잡 지방의 시크교(Sikhism) 신도는 19세기 후반부터 캐나다로 이주했다. 시크교는 이슬람교와 힌두교를 혼합한 소수 종교로 영향력이 제한적이다.

처음에도 영국 군대에서 제대한 시크교 군인이 경찰이나 야간 경비원 등으로 취직했다. 1900년대 본격적으로 이주가 시작됐으며 벌목노동자나 제조업체 근로자로 일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하면서 파키스탄이 분리돼 나가며 종교적 분쟁이 발생하자 펀잡 지역에 거주하던 시크교도의 이민은 더욱 늘어났다. 2021년 기준 캐나다에 거주하는 시크교도는 77만 명이 넘는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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