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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출범한 이명박정부는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을 강조하며 대기업 우선의 성장정책을 펼쳤다. 표과가 없어 사장됐던 용어를 다시 꺼집어 낸 것은 2022년 권력을 쥔 윤석열정부였다.2022년 7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규제·세금 완화, 기업 투자 제고, 경제 활성화, 세수 확충이라는 낙수효과로 경제정책의 초점을 맞춘다고 밝혔다.기업에 대한 규제완화·감세로 투자를 이끌어내고 고용을 창출하며 소비가 증가하는 경제 선순환을 기대하는 것이 낙수효과의 목표다.대기업은 윤석열정부의 정책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지난 3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가 낙수효과로 좋아졌다는 징후는 찾아보기 어렵다.오히려 대기업의 편중이 심화되며 지속가능 성장의 기반이 붕괴됐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가 건전하게 발전하려면 대기업이 협력업체와 상생하는 기업문화를 정립해야 한다. ▲ 삼성문화 4.0 어떻게 진화할 것인가 표지 [출처=글로세움]◇ 창업주의 동업 실패가 협력업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제공한 요인... 2~3세 경영철학도 바뀌지 않아최근 삼성그룹의 간판 기업인 삼성전자가 반도체와 가전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삼성전자는 수 많은 협력업체와 공조속에서 경쟁력을 확보했지만 배려는 부족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삼성의 불공정한 거래에 대한 불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삼성이 협력업체와 삐그덕거림은 이병철 회장의 초기 동업의 실패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동업에 대한 생각과 철학, 행동방식이 상생하지 못하는 기업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병철 회장은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건강상의 문제로 학업을 중단한 채 귀국해 1938년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시작했다.물산의 중심지인 대구에서 쌀과 건어물 등을 사들여 만주나 일본으로 파는 무역업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켜 전쟁물자가 부족했고, 만주도 일본군이 군수물자를 조달하면서 수요가 많았다.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의 곡물수탈 정책에 따라 쌀의 매입이 상대적으로 쉬웠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과거의 전력 때문에 삼성은 일본의 조선식민지 정책의 수혜자라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지만 약간 억지로 보인다.일본이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삼성상회의 사업은 번창했다. 해방 이후인 1948년에는 서울로 활동무대를 옮겨 삼성물산공사를 설립했다.해방 이후 열악한 국내 산업시설과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리던 소비재 수입을 위해 무역업에 주력했다.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6·25전쟁으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전란으로 초래된 물자부족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수입대체 정책을 잘 활용했다.1950년대 초 설립한 삼성물산, 제일제당, 제일모직은 밀가루, 설탕 등 수입에 의존하던 생활필수품을 국산화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1960년대 들어 삼성은 정부의 경제계획에 재빠르게 편승했다. 당시 정부는 후진적이고 소규모인 기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몇몇 업체에 독점적인 지위를 부여하고 신규 업체의 진입을 규제하는 방식을 취했다.정부 정책에 따라 재벌기업은 어떤 산업이라도 무조건 진출해보자는 식의 전략을 펼쳤다. 결과적으로 재벌의 문어발 기업경영의 출발점이 됐다.재벌은 1970년대 중화학공업, 1980년대 조선과 전자산업 등의 영역에 정부가 전폭적인 지원을 하게 됨으로써 관련 계열사를 계속해서 늘릴 수 있었다.1979년의 2차 오일 쇼크, 1980년대 초 3저 현상도 국내 기업이 국제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1986년 아시아게임, 1988년 올림픽을 계기로 국가이미지가 상승되면서 대기업도 해외시장에 브랜드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이병철 회장의 초기 경영 특징 중 하나는 위험부담 회피를 위해 적극적으로 동업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1962년 LG그룹 구인회 회장과 동양를 같이 인수하면서 동업을 시작했다.하지만 양측에서 파견한 직원 간 의견충돌이 잦아지자 구인회 회장은 '돈'보다는 '인간관계'가 우선이라면서 지분을 정리하고 떠났다. LG는 인화경영을 중시한다.효성그룹의 조홍제 회장과의 동업은 더욱 복잡하고 길다. 공개적으로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병철 회장과 조홍제 회장 두 사람은 1949년 삼성물산공사, 1954년 ㈜제일모직공업을 같이 설립했다.1960년 3월 동업관계가 정리되었지만 지분에 대한 다툼은 오래 지속되었고 1965년이 되어서야 종결됐다. 조홍제 회장은 이병철 회장이 갖고 있던 한국타이어와 한일나일론의 지분을 받는 대가로 제일제당 등의 지분을 포기했다.2000년 발간된 조홍제 회장의 회고록 『나의 회고』에 이병철 회장과 동업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이병철의 집필한 『호암자전』과는 다른 내용이 있어 진위 여부에 논란이 일기도 했다. 누구의 주장이 맞는지는 판단하지 않는다.이병철 회장은 1950년대 중반 제일제당의 설탕을 독점판매하던 동양그룹의 이양구 회장과도 동업을 진행했다. 이들의 관계는 1956년 이양구 회장이 삼척시멘트 인수를 주장하면서 무너졌다.이양구 회장은 정부의 경제재건 계획에 따라 시멘트의 수요가 급증할 것이라고 예견하여 인수를 주장했지만 이병철 회장은 반대했다.결국 이양구 회장이 제일제당의 주식을 팔고 삼척시멘트를 독자적으로 인수해 동양세면트로 상호를 변경했다. 그러나 이후 동양세면트는 사업환경 악화에 따른 경영부실로 동양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했다. 결국 경영 측면에서 보면 이병철 회장의 인수결정 반대가 옳았다고 본다.기업문화에는 창업주의 경영철학이 절대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병철 회장이 어떤 이유에서든 동업자와 오래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거나 불만족하게 동업을 청산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는다.삼성에 상생의 기업문화가 형성되지 못한 것은 사업 초창기 창업주의 경력과 고집이 반영됐다고 본다. 삼성 내부에 ‘내가 최고’, ‘나만이 옳다’는 제일주의가 팽배하면서 파트너와 협력을 어렵게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다.상생 마인드가 부족한 기업문화는 삼성의 사업 전반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병철 회장 이후 2대인 이건희 회장, 3대인 이재용 회장도 창업주의 경영철학을 답습해 개선되지 않았다.◇ '초과이익공유제'는 사회주의 용어라고 비판받아... '동물원 우리 안에 갇힌 동물' 신세가 된 중소기업한국 대기업은 사업 전망이 불확실하거나 사업 규모가 작을 때는 협력업체에 맡기다가 사업성이 확실하게 보이면 바로 합병하거나 회사를 설립한다.기술이 괜찮은 벤처기업이 있으면 어떻게든 독점 납품계약을 체결한다. 처음에는 매출을 보장해주다가 납품업체를 다변화하는 방법으로 매출을 줄여 나간다. 혹은 매출을 보장해주는 댓가로 터무니없는 원가절감을 요구한다.핵심 기술자를 스카우트해 위장 협력업체를 차려 기존 협력업체를 고사시키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사업을 하다 보니 국내 대기업은 대부분 협력업체와 분쟁이 빈발한다.특허권을 침해했다는 불평에서부터 부당한 납품단가 인하, 물량 줄이기, 거래단절 등이 대표적이다. 정부의 소위 말하는 ‘기업 프렌들리’ 정책이 대기업 우선주의 정책으로 변질되면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가 더 열악해졌다.중소기업의 입장에서는 원자재 가격과 인건비가 상승해 오히려 납품단가를 더 올려 받아야 하지만 대기업은 수출채산성을 들먹이며 납품단가를 강제로 깎기 일쑤다.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정부가 대기업의 수출경쟁력 제고를 위해 고환율정책을 유지했지만 그 혜택은 대기업에만 집중됐다.당시 이명박정부는 대기업이 수출을 많이 하고 이익을 내면 중소기업도 덩달아 돈을 벌고 국민소득도 자연스럽게 높아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낙수효과’는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간극은 더 벌어졌다.대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협력업체와 동반성장해야 한다. 대기업은 제품 기획력과 마케팅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여 초과이윤을 창출한다고 주장하지만 설득력이 약하다.대기업의 불합리한 중소기업 처우가 국가경쟁력을 떨어뜨리는 주범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례로 입증할 수 있다. 대기업은 덩치가 크고 위험을 회피하기 때문에 신성장 동력을 확보하지 못한다.2011년 이명박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초과이익공유제’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들고 나온 것도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동반성장을 목표로 한 것이다.사회주의 용어라는 비판에서부터 협력업체가 너무 많고 비중을 측정하기 어려워 이익을 나누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논란이 가라앉지 않았다.당시 여당의 주요 정치인, 보수 언론, 보수 경제학자 등이 초과이익공유제에 대해 반대했다. 대기업들은 정부의 정책이라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지만 무조건 반대했다. 그러나 용어의 적절성 논란을 뒤로 한다면 시도 자체가 나쁜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부 경제전문가는 국내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관계를 동물원의 ‘사육사’와 우리 안에 갇힌 ‘동물’에 비유한다.사육사는 갇힌 동물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먹이는 주지만 관리하기 힘들 정도로 충분히 주지는 않는다. 야성을 잃은 동물의 능력이 서서히 퇴화하듯이 제품개발과 경영혁신의 열정을 잃은 중소기업은 대기업의 핵심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없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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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그룹(이하 LG)은 현대그룹, 삼성그룹과 함께 3강 체제를 구축하다가, 현대그룹의 몰락으로 2위권에 진입했지만 단기간에 약진한 SK그룹에 의해 3위로 밀렸다. 그러나 동업관계를 유지하던 구씨와 허씨 일가 등이 분가하면서 GS그룹, LS그룹, LIG그룹 등과 분리되었고 삼성그룹, SK그룹, 현대차그룹 등에 의해 중위권으로 밀린 대기업이다.LG는 직전에 다룬 GS그룹과 3대에 걸쳐 동업관계를 유지하다가 청산했다. 동업관계를 정리하면 대부분 동업자끼리 원수가 되는 것과 달리 큰 다툼 없이 정리해 모범적인 사례로 불린다.LG는 전자, 화학, 통신을 차지했고, 분가한 GS그룹은 정유, 유통, 건설을 가지고 나갔다. LG는 가전, 화학, 생활건강 등의 제품을 생산하지만 자체 유통채널이 없어 소비재 시장에서 경쟁력 약화가 우려됐지만, 제조업이 아니라 전문 유통업체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어 타격이 심하지 않다.분사된 또 다른 그룹인 LS그룹도 전선, 제련 사업중심의 중견그룹이 되었지만 시장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분가 이후 각자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지만 규모(scale)나 시너지(synergy) 측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 투자금과 더불어 가족까지 받아들여 아름다운 동업의 기반인 신뢰형성창업주 구인회 회장은 경남 진주에서 시작한 장사가 망했지만 사돈의 투자를 받아들여 화장품 크림판매업에 다시 뛰어들었다. 화장품 판매업으로 성공을 하자 1947년 직접 크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화장품에서 시작한 사업은 비누, 치약 등 생활용품으로 확대돼 그룹의 기반이 됐다.현재 LG의 밑바탕은 1958년에 설립된 금성사로 현재의 LG전자다. 초기에는 부품을 조립하는 수준이었지만 차츰 직접 제조를 하면서 국내 전자산업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삼성이 사업 리스크(risk)가 낮은 제당이나 섬유와 같은 소비재 생산에 전념할 동안 LG는 과감하게 전자산업에 발을 디딘 셈이다.사업초기에 투자를 받은 것에 그치지 않고 사업을 확장하면서 돈이 부족하면 구씨와 허씨 집안이 공동으로 출자를 했다. 다른 동업과 차이가 나는 점은 투자자끼리 역할을 배분하고, 가족들을 모두 직원으로 받아들이는 전략을 선택했다는 것이다.대부분의 경영자들은 투자와 경영을 분리해 투자자와 관련된 사람들을 직원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아 자리를 주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감시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경영을 투명하게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투명경영을 할 생각도 없고, 할 자신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 두 집안의 동업은 특이하다. 구씨가 투자금에 대한 배당도 철저하게 했기 때문에 허씨는 지속적으로 투자를 했다고 한다. 기업경영을 하면서 마음만 먹으면 실적이나 이익을 얼마든지 속일 수 있기 때문에 대부분 속이고 정산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사업이 확장되어도 이들은 묵시적인 원칙에 따라 지분율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서로 조금 더 가지기 위해 다투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로가 상대방의 역할과 능력을 존중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가풍이 기업전반에 녹아 있어 LG는 다른 대기업에 비해 신뢰를 중시하고, 또 임직원이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화 중시형의 기업문화가 조직의 역동성을 죽였다최근 LG는 창사 이래 가장 우울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룹의 간판회사인 LG전자가 스마트폰 시장의 대응실패, LG디스플레이가 업황 부진으로 극심한 침체의 나락으로 빠지고 있다.일명 ‘회장님 폰’을 개발해 스마트폰 시장에서 잃어버린 위상을 찾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1위 삼성전자와 벌어진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LG전자의 가전도 중국업체의 급부상으로 실적이 예전만 못하다. LG디스플레이도 필립스가 철수한 이후 독자생존에 의문이 생기고 있는 중 산업자체가 불황으로 빠져들면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다. 다만 위로가 되고 있는 것이 LG화학이 전기차용 배터리시장에서 시장선점을 무기로 급부상하고 있고, LG생활건강이 화장품, 식음료 등의 시장에서 시장지배력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는 LG텔레콤, 데이콤, 파워콤 등 통신계열사의 성적도 만년 꼴등으로 초라한 성적을 내고 있어 전망이 밝은 것은 아니다. 데이콤과 파워콤은 M&A 이후 내부갈등과 기업문화의 전이 실패로 실적이 악화되어 LG기업문화가 용융성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를 낳고 있다.LG는 구씨와 허씨 집안이 동업을 했고, 또 다른 기업과 달리 가족들이 경영에 직접 참여해 의견충돌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인화’를 강조했다. 인화는 오너집안뿐만 아니라 모든 임직원에게도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덕목이었다.GS에서도 지적했지만 LG도 조직내부의 과업갈등(Task Conflict)이 매우 부족하다. ‘인화’는 갈등을 원천적으로 발생시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업갈등이 감정갈등(Emotional Conflict)으로 치닫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LG의 직원들과 회의를 하면 치열한 토론이 진행되지 않는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준비한 자료를 보고하고 만다. 자료를 준비할 때도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작성자의 의견을 최대한 용인한다.비단 LG만의 문제가 아니다. 중견기업이나 벤처기업의 경우에는 치열한 토론이 일상화되어 있지만 국내 대기업 대부분이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조직 분위기로 인해 과업갈등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갈등이 없는데, 창의적인 사고를 하거나 기존의 업무방식에 변화를 기대하는 것은 어림없다. 회장은 발상을 전환하고, 창의적인 사고를 하라고 외치는데, 정작 경영진조차도 기존 사고의 틀(frame)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국내 대기업의 현실이다. 변화를 거부하는데 새로운 제품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20세기 산업화 시대에서는 시장의 1등 기업이, 선진국의 기업이 하는 사업만 모방(copy)해 국내시장에서 열심히 노력하면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다. 관세나 기타 정부의 지원으로 국내시장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정보가 공개되어 있고, 글로벌 시장이 통합되면서 모방만으로 국내시장을 지키는 것도 어렵다. 결과적으로 LG가 강조하고 자랑했던 ‘인화의 문화’가 조직의 역동성을 없앴다. 글로벌 경쟁이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으로 다가왔고, 게임의 법칙(the rule of game)이 바뀌었는데도 서로 눈치를 보면서 애써 외면했다. 역동성이 사라지고, 변화를 외면한 대가는 가혹하다. 경쟁력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사업전반이 침체되고 있는 중이다. 역동성을 살릴 수 있는 특단의 조치기 필요하다.◇ 컨설팅 업체나 참모의 조언은 참고사항, 경영결과는 오너의 책임최근의 LG를 망하게 한 주범이 몇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그룹의 지주회사이고, 다른 하나는 컨설팅업체라는 말이 있다. LG뿐만 아니라 유동성 위기를 경험하고 있는 웅진그룹도 컨설팅업체의 조언을 따라 대규모 M&A를 한 것이 부실을 초래했다는 지적을 받는다.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형 경영은 전부 문제가 있고, 미국이나 서양의 경영이론을 도입하는 것이 선진경영이라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경영컨설팅을 하는 외국계 컨설팅회사가 우후죽순(雨後竹筍) 생겨났고, 호황을 누렸다. 이들은 미국이나 유럽에서 검증됐다고 하는 이론들을 국내 실정에 맞도록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하지 않고 그대로 적용했다. 새로운 경영기업이나 M&A기법들이 ‘도깨비 방망이’처럼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고, 일확천금(一攫千金)을 벌어 줄 것이라고 착각했다.처음에는 개선효과가 뚜렷하게 보이는 듯 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자 부작용이 속출하기 시작했다. 모 글로벌 컨설팅업체가 LG를 컨설팅한 결과도 마찬가지다. LG전자를 컨설팅 하면서 경쟁력이 없는 가전사업은 버리고, 휴대폰도 미래가 불투명한 스마트폰에는 투자를 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런대로 잘나가며 삼성전자와 쌍벽을 이루던 LG전자가 몰락한 이유다.LG가 전계열사를 동원해 삼성전자의 갤럭시 시리즈를 능가하는 스마트폰을 만들었지만, 시장에서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최근 몇몇 대기업이 잘못된 사업전략과 M&A로 휘청거리는 이유가 유명 컨설팅업체의 조언 때문이라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다. 이제는 아예 컨설팅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컨설팅업체들도 할 말은 있다. 기업들이 자신들의 조언을 충실히 따르지 않아서 그와 같은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자신들이 피해자라는 논리를 펼친다. 기업들이 컨설팅업체의 조언 중 취사선택(取捨選擇)해 오너나 경영진의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서 실행하기 때문에 의도한 성과가 나지 않았다는 논리다. 양측의 주장이 전혀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업경영의 결과는 오너나 경영진이 져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컨설팅업체나 참모의 조언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지주회사도 책상 앞에 앉아 뜬 구름 잡는 소설만 쓰지 말고, 계열사 경영진의 역량을 믿고 권한을 대폭 위임해 줘야 한다.참모는 조언자이지, 지휘관이 아니다. 조언자가 권한을 가졌다고 느꼈을 때 그 조직은 망한다. LG의 오너도 작금의 위기를 타개할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세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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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성그룹(이하 효성)의 창업자인 조홍제 회장은 삼성의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과 결별한 후 1962년 효성물산을 설립해 그룹의 기초를 마련했다.효성은 중공업, 산업자재, 섬유, 화학, 건설, 무역, 정보통신, 금융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으며 2012년 6월 말 기준으로 계열사는 지주회사 역할을 수행하는 ㈜효성을 포함해 111개이다. 유가증권 시장에 4개, 코스닥 시장에 1개 등 총 5개사가 상장되어 있으며, 비상장사는 국내 41개, 해외65개 이다.매출액은 크지 않지만 계열사수로는 삼성, LG과 유사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성장은 정체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자금난 겪는 삼성물산공사에 돈 빌려주고 동업삼성그룹(이하 삼성), LG그룹(이하 LG), 효성의 창업자들이 서부 경남 대지주 출신이고 경남 진주의 지수초등학교 동문이라는 사실은 너무 잘 알려져 있다. 동향 출신인 이들은 자연스럽게 사업적으로 관계를 형성했고, 국내 재벌기업의 역사를 같이 쓰게 되었다.조홍제 회장은 1948년 삼성 이병철 회장이 만든 삼성물산공사가 자금난을 겪게 되자 돈을 빌려주면서 동업을 시작했다. 그는 인생의 황금기인 40~50대를 삼성그룹에서 보냈다. 삼성 이병철 회장의 요구로 동업을 청산했으며, 청산하는 과정에서 의견이 맞지 않아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2006년 효성에서 ‘효성 40년사’를 내면서 삼성 이병철회장에 관련된 부문이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과 달라 호사가의 입방에 오르기도 했다. 조홍제 회장은 삼성의 제일제당, 제일모직의 설립을 주도하면서 산업의 흐름에 대해 경험을 하였다. 1962년 이병철 회장과 동업을 청산하면서 법정관리 중이던 조선제분을 인수했다. 그리고 같은 해 한국타이어, 1963년 조선피혁을 인수하면서 그룹의 기반을 구축했다.1966년 동양나이론을 설립하면서 꿈에 그리던 섬유사업도 시작했다. 다른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경제계획에 편승해 1970년대는 중공업, 목재, 기계로 사업을 확장했다. 1980년대는 석유화학, 전자산업에 뛰어들면서 사업다각화를 꾀했지만 효율성을 높이지는 못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도래하자 다른 대기업이 인력감축을 고민할 때 효성은 주력기업을 통폐합하고 비주력사업은 매각하거나 청산했다. 계열사간 지급보증을 해소하고, 자연스럽게 관리인력을 축소할 수 있었다.모든 조직을 퍼포먼스 유니트(PU: Performance Unit)로 바꾸고 PU별 책임경영체제를 구축했다. 주력계열사 합병, 비핵심 사업부문 매각 등의 혁신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현재는 주요 사업별 퍼포먼스 그룹(PG)으로 체제가 개편되어 있다.◇ 후계자는 추진하던 사업부실화로 리더십에 큰 타격효성은 한때 재계서열 5위까지 올라 갔지만 조홍제 회장이 자식들에게 기업분할을 해 주면서 중견그룹으로 사세가 위축되었다. 둘째 아들에게는 한국타이어, 셋째 아들에게는 동성개발, 큰아들인 조석래 회장은 그룹의 사명과 나머지 기업을 물려줬다.한국타이어도 계열사를 늘리면서 성장세를 지속했지만 미미한 수준이고, 동서개발은 사업부진으로 쪼그라들고 있다. 효성도 IMF위기를 잘 극복하기는 했지만 사업적으로 정체되어 있으며 새로운 성장동력을 얻는데 실패했다.2세인 조석래 회장은 보수적으로 사업을 유지했지만, 3세가 경영의 전면에 나서면서 효성이 적극적으로 변하고 보수적 색채가 옅어지고 있다.조석래 회장의 장남인 조현준 사장이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그는 2006년 이후 건설과 IT부문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적극적 M&A를 했지만 대부분 실적이 좋지 않다. 진흥건설은 인수 후 연속 적자를 거듭하다가 워크아웃되었다. 진흥건설은 알짜로 평가돼 정치적 특혜의혹까지 받았던 기업이라 부실에 대해 아쉬움이 클 것이라고 본다.IT관련 기업들도 적자로 자본잠식상태에 빠져 그룹의 지원으로 겨우 버티고 있지만 앞날이 캄캄하다. 기존의 사업영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미래산업으로 불리는 IT로의 진출의도는 좋았지만, 체계적인 전략이 부족했다는 지적을 하는 전문가가 많다.하이닉스반도체 인수시도도 좋았고, LED관련 사업을 하는 갤럭시아그룹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시대적 변화의 흐름을 읽지 못했다. 휴대폰의 부품인 키패드를 생산하던 기업을 인수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휴대폰이 터치폰으로 바뀐다는 것은 예측하지 못해 실패한 M&A가 됐다. 조현준 사장이 갤럭시아그룹을 펼칠 때만 해도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재벌그룹의 장남이 하는 사업이고, 그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실적을 낼 것이라고 예상됐다. 하지만 유상증자로 자금을 지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자탈출은 요원한 실정이다. 오히려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자본잠식상태일 뿐만 아니라 사업전망도 어두워 지속가능여부가 불투명하다는 것이다. 주요 투자자나 외부 전문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리하게 지원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은 셈이다.장자가 가업을 잇는 것이 전통인 효성의 입장에서 조현준 사장이 추진한 사업이 부실화되면서 그의 리더십이 타격을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손대는 것마다 황금으로 변하는‘마이더스(midas)의 손’이 아니라 손대는 것마다 적자가 나는‘마이너스(minus)의 손’이라는 우스개 소리도 한다.그렇다고 조석래 회장의 차남과 삼남의 경영능력도 검증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차남은 그룹 내 위상이 줄어들고 있고, 삼남도 마찬가지다. 조석래 회장의 건강이 좋지 않고, 고령이라는 점도 부정적인 요소다.효성의 기업문화 특징은 실속 우선주의, 심사숙고, 철저한 계산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효성의 창업자는 생전에 3명의 자식에서 계열사를 분리해줘 유산분쟁이 없었다. 조석래 회장도 3형제에게 그룹을 분리해 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된다면 효성의 사세는 더욱 위축될 것이라고 본다.㈜효성이 지주회사의 역할을 수행하며 오너 일가의 지분율이 높아 경영권은 안정되었지만 무분별하게 펼친 계열사의 부실은 고민이 된다. 아무리 오너의 적자라고 해도 반복해 실패하면 조직 내∙외부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란 쉽지 않다.◇ 창업자와 달리 정치와 가깝게 지내며 부정적 여론 초래창업자는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지만 후계자들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연대 한다는 인상을 준다. 2007년 3월 참여정부 말기 조석래 회장이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참여정부가 재벌개혁을 외쳤기 때문에 정부와 전경련 사이는 좋지 않았다.하지만 사돈지간이자 친기업적 정책을 표방한 이명박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평가됐다. 효성의 이름이 언론에 전면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MB정부의 출범부터이다. 특별히 눈에 보이는 사업적 특혜를 준 것은 아니지만 면죄부는 받는 경우가 많았다. 2007년 대검찰청이 효성의 비리를 수사했지만 이를 덮었다가 2009년 공소시효가 소멸되었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했다. 검찰이 정작 사건을 미적거리면서 시간을 끌다 불기소 처분을 한 것은 대통령 사돈기업에 대한 배려차원이라는 세간의 평가였다.2009년도에는 효성이 미국에서 위장 부동산 거래를 하면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주장이 민주당 국회의원에서 의해 제기되었지만 무시됐다. 하지만 끊임 없는 의혹과 사실이 밝혀지면서 2010년 7월 검찰은 조현준 사장이 2002~2005년 회삿돈으로 해외부동산을 취득해 횡령을 하였다는 명목으로 기소했다. 이 사건은 1심부터 유죄를 선고 받았고, 2012년 9월 대법원에서 확정판결 받았다. 효성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게 만든 사업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2006년부터 추진한 일명‘세빛둥둥섬’이다. 한강에 전시와 공연을 위한 공간을 확보하는 차원인데, 이 인공섬 조성 및 운영사업권을 가진 기업이 플로섬으로 효성의 계열사이다.서울시 공무원들이 시장의 승인도 받지 않고 계약변경을 통해 특혜를 주는 등 부실백화점이라는 사실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부임하면서 밝혀졌다. 각종 특혜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운영이 되지 않아 현재 흉물로 방치되고 있다.서울 서초구 반포 도요타매장의 공원용지의 형질변경 허가와 완공전 사용허가도 특혜의혹이 있었지만 정식적으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 건물은 일본 도요타 자동차를 수입해 판매하기 위해 만든 전시장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효성 오너 일가기업인 로우테크놀로지도 2009년 국방부의 훈련장비 납품하면서 단가를 높이고 허위 세금계산서를 발급하는 수법으로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을 받았었다. 옛말에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는 말도 있고 ‘참외밭에서 신발끈을 매지 말라’는 말도 있다. 모두 의심받을 수 있는 행동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노태우 정부때 사돈기업이었던 SK그룹이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 이동통신시장의 1위 사업자로 자리매김했듯이 정권마다 특혜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더구나 친기업정책을 표방한 MB정부에서 대통령의 사돈기업이 특혜를 볼 것이라는 의심은 누구나 할 수 있었다.효성이 기업에 필요한 산업재가 주력사업이기 때문에 국민의 부정적 인식이 사업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겠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한국에서 기업가는 정치와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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